[소노하나] 발렌타인의 AB커플
B.
발렌타인 전날.
나는 초콜릿을 준비했다. 클라라 님과 반 아이들에게 나눠줄 것. 그리고 그녀에게 줄 것을.
이상한 일이다. 그녀와 주고받은 초콜릿만 해도 열 개가 넘을 것이다. '잘 먹을게요'를 반복하던 날들. 그게 다음날부터는 바뀔 것이다. 그저 '잘 먹을게요'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불안하다. 무섭다.
나는 정성스레 포장한 박스를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까끌한 촉감이 뭉친 숨결을 고르게 퍼트려주는 것 같다. 크게 한숨을 쉬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직접 만든 초콜릿과 세 번이나 다시 써버려린 편지.
"우도우 에이코 양에게……."
괜히 편지봉투 겉면에 쓴 이름이 이상하진 않은지 읽어본다. 우도우 에이코. 뛰어난 아이, 라고 써서 에이코(英子). 그 이름을 쓰는 게 이리 어려울 일이었을까. 이름을 겉면에 써버렸을 때, 꼭 무언가 큰일을 저지르고야 만 것 같은 느낌.
당신은 알까.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걸.
유우나 님과 했던 상담을 생각했다. 유우나 님은 응원해주셨다. 그건 사랑이고, 나는 할 수 있다고. 무엇을? 이 사랑을 쟁취하기를?
이제 내일인데도 현실감 없이 두리뭉실하다.
그 순간이 얼마나 떨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자꾸만 읊조리는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좋아"의 미묘한 차이 중 뭘 택하면 좋을지 모른다.
나는 잠에 들 때까지 그 세 문장을 자꾸만 되풀이하였다.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좋아.
"아! 이쿠에 양."
에이코 양이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왠지 도망칠 것 같은 발을 바닥에 꼭 붙이고,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평안하세요오~ 에이코 양."
"평안하세요. 해피 발렌타인이에요."
해피 발렌타인이라는 말에 크게 몸이 떨렸다. 막 부뚜막에 올라서려다가 들킨 고양이처럼. 너무 부끄럽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수상한 거동을 눈치챈 에이코 양이 물었다.
“괜찮아요? 아, 혹시 제 감기가 옮은 거 아니에요?”
가까이 다가와 나와 눈을 마주치는데, 나는 정말 도망가고 싶어져서. 가지런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에 주는 힘만큼, 다리가 땅에 꼭 붙어있기를 바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술에서 비릿한 고통이 퍼지고 있었다. 그 고통을 상기하며 용기를 냈다.
"에이코 양, 괜찮으시다면 오늘 방과 후에 뒤뜰에 와주실 수 있나요?"
“제발”을 덧붙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에이코 양은 의문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같이 가는 게 아니라 제가 먼저 가 있는 건가요?"
"아, 네……. 제가 잠깐 뭐 할 게 있어서어……."
의외의 질문에 당혹스러울 때,
“평안하세요. 두 분 모두.”
낯익고, 여느 때보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펴, 평안하세요오. 클라라 니임.”
“평안하세요. 클라라 님!”
클라라 님의 등장으로 질문이 어물쩍 넘어갔다.
……는 듯싶었으나.
“클라라 님, 방과 후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에이코 양이 클라라 님과 함께 오려는 것을.
“저기, 클라라 님…….”
클라라 님이 오시면 곤란한데.
스스럼없이 곧장 클라라 님께 말씀드리는 에이코 양이 조금 밉다. ...아니, 그런 면을 좋아하는 거지만.
가슴 속이 오후 광장의 비둘기가 일제히 날아오른 것처럼 소란스럽다. 어떻게 말하면 단둘만 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클라라 님을 먼저 보낼 수 있을까. 고민은 끝내 해답까지 덩어리지지 못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클라라 님을 바라보았다.
“아, 저는…….”
클라라 님이 잠깐 텀을 두더니,
“루시아 언니와 선약이 있어서 일찍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시며, 묘하게 나를 보고 웃으셨다.
클라라 님……! 감사합니다! 클라라 님이 이렇게까지 구원자로 보인 적이 있던가. 마주친 눈빛으로 최선을 다해 감사를 전했다.
클라라 님도 협력해주신 자리를 망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마음을 굳혔다. 그래, 나는 오늘 에이코 양에게 큰일을 저지르고 말 것이다.
클라라 님은 먼저 돌아가시고, 에이코 양도 뒤뜰로 가서 나밖에 없는 교실. 복도에는 아직 반 아이들이 몇 남아있었다.
“그때 파티에 그 기업 후계자분이…….”
“어머, 그분이라면 벌써 약혼자가 계신 게 아닌지?”
“아이참, 아직 저희가 몇 살인데. 약혼이란 건 바뀌기 마련이랍니다.”
확연히 들릴 정도로 큰 소리는 아니지만, 내가 집중해서일까. ‘약혼’이라는 말이 팍 박혀 들어왔다. 그들의 대화가 먼 세계 일처럼 느껴진다.
아직, 부모님은 약혼에 대한 말씀은 없으시다. 아직, 우리가 몇 살인데. 약혼이니, 장래니 결정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 그렇지만 그 아직이 얼마나 갈까. 에이코 양도, 나도 ‘아직’일 때가.
나는 책상에서 초콜릿 상자를 꺼냈다. 정말 직전. 아직 처음으로 물릴 수 있는 기회.
어젯밤 수십 번을 들여다보았던 상자 속이, 오늘도 그대로다. 그대로인 마음을 다시 덮어, 하얀 비닐백 속에 넣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마지막으로 한 발자국만 더.
뒤뜰에 들어서면 살짝 선선했다. 햇볕이 강하게 쏟아지는 운동장과 다르게, 교사 건물에 가려지고 나뭇잎을 지난 부드러운 빛만 드나드는 곳. 한 번 체에 걸러진 것 같은 고운 세계에 에이코 양만이 혼자 서 있었다.
나무 위에 무언가에 시선이 꽂힌 표정.
“응? 이쿠에 양.”
에이코 양이 나무에서 시선을 떼고 내게 다가왔다.
“저 위에 누가 지어둔 새집이 있나 봐요. 짹짹이는 소리가 들려요.”
“정말요?”
자세히 보니 목재로 지은 새집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아마 학교에서 관리하는 것이겠지. 안에 새가 있는지 정말 새소리가 들렸다. 에이코 양은 다시 새집을 빤히 지켜보았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무언가를 보면 끝없이 집중하는 것. 그 집중력은 짧지만, 정말 긴 것에 꽂힌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게 늘 궁금했다.
새는 에이코 양의 시선이 따가웠는지 고개를 빠곰 내밀었다. 갈색 머리가 꽤 귀여웠다. 새는 주위를 살피더니, 그 작은 구멍에서 쏙 빠져나와 날아갔다.
"아……."
에이코 양은 안타까움을 입에서 터트리고, 날아가는 새가 멀리멀리 날아갈 때까지 보았다.
저 시선이 영원히 발 붙어있는 것에 머물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당장 날아가 버리는 새가 아니라…….
“그러고 보니 오늘 초콜릿은 안 드렸네요.”
그러면서 에이코 양이 준 초콜릿은 클라라 님에게 드린 것보다 조금 작고, 반 아이들에게 나눠준 것보다는 조금 더 정성 들인 포장이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뒤로 숨긴 초콜릿이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저, 우세요?"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나만의 감정. 내게만 있는 감정 당신의 것은 아닌 감정. 나 혼자라는, 치명적인 겁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이쿠에 양……?"
이쿠에 양이 다급히 내 고개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엉망일 얼굴이 곧게 펴지지 않았다.
보여주기 싫은데. 도망치고 싶은데. 나를 살펴보는 그녀의 눈빛이 좋다. 나를 위해 온전히 쓰는 이 시간이 좋다.
턱을 잡던 손은 어느새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너덜너덜한 숨결 탓에 깊이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장 걱정되는 일을, 나는 말했다.
"에이코 양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미움이라니……."
"에이코 양이 내 앞에서 사라질까 봐……."
에이코 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쿠에 양, 제가 왜 사라지겠어요."
에이코 양이 날 달래려는 듯 손을 잡아주었다.
꼬옥 잡은 손에서 그녀의 다정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그 따스함이 도리어 무서웠다. 옅은 열기가 곧 지워질 것 같다. 울음 탓에 온몸이 맥박질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에이코 양은 절 좋아하시지 않잖아요!"
한껏 토해내고 나서야, 현실감이 어질어질 피어 올라왔다.
눈치챘을 때는 그렇게도 빌고 빌었던 다리가 달리고 있었다.
망했다.
난 내 방에 틀어박혀 침대 한가운데에 무릎을 안으며 앉았다.
정말 엉망이었다. 유우나 님과 클라라 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워졌다. 그 두 분을 떠올릴 면목도 없었다.
가슴에 감정의 자리가 있다면, 자신감이 닳아없어져있는 게 보일 것 같았다.
'내일 학교…….'
너무 울어서 팽팽해진 기분 속에 하나 이성적인 생각이 들어왔다. 수업은 내일도 있다. 학교에 가면 에이코 양을 만날 것이고, 어찌 됐든 반나절을 함께 있어야 한다. 에이코 양이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얼굴을 할지.
방안 가득 막연한 겁이 차올랐다. 나는 거기에 빠져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쩌면 좋지. 하루나 이틀 정도는 병결을 낼 수 있겠지만, 그 이후엔…….
똑똑. 외부의 소리에 방 안에 있던 겁이 쫙 빠졌다. 욕조의 마개를 연 듯.
"이쿠에 양, 괜찮아요?"
"에, 에, 에, 에이코 양?!"
"들어갈게요?"
내 방문으로 에이코 양이 들어왔다. 머릿속에 '어?'라는 큰 글자 하나가 쾅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에이코 양은 곧장 내 침대 옆쪽에 앉았다. 나도 그쪽으로 몸을 옮겨 나란히 앉았다.
"편지 읽었어요."
"네……?"
에이코 양은 가방에 손을 넣었다. 안에서 어젯밤 내가 그토록 만지던 초콜릿 박스가 나왔다.
생각해보니 들고 있던 초콜릿 박스가 어느샌가 없어졌었다. 무작정 뛰쳐나갔을 때 나도 모르게 손에서 놓아버린 걸까.
이런 식으로 진행될지 몰랐기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이쿠에 양, 저는."
운을 떼는 에이코 양의 다음 말에, 나는 다만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A.
저질러버렸다.
너무 놀랐다. 설마 이쿠에 양이.
"……."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말은 똑바로 하자. 설마 '이쿠에 양이' 아니라, 설마 '바로 오늘'.
이쿠에 양에 대해서는, 아마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확신은 아니었지만, 오늘 확신으로 변하였으므로. 그 애가 날 좋아하는 것. 그리고 오늘이 그것의 절정이었다는 것.
나는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잠깐 심호흡을 하곤, "죄송해요."라고 말해버렸다.
감히 내가 어찌 그녀와 사귈 수 있겠어.
저 멀리 하늘에서 새떼가 날아간다. 모두가 줄을 맞춘 가운데, 한 마리 새가 조금 늦어 대열이 흐트러졌다. 그게 보기가 싫어서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어떻게 클라라 님을 배반하면서, 그녀와 사귈 수 있겠느냐고.
나는 다시 걸어갔다. 얼른 침대에 가 눕고 싶다. 해 질 녘 귀갓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이러기 있기예요?"
지금처럼 기품있고 아름답지만, 조금 귀여운 어린 날의 클라라 님.
클라라 님이 전에 없이 화내셨을 때가 있었다.
공작시간이 있는 날이었는데 내가 깜빡하고 가위와 풀을 두고 온 날이었다. 당연히 가위와 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클라라 님은 싸늘한 눈길로 어린 나를 바라보셨다. 그것만큼 무서운 일이 있었을까. 나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 제가 다른 조 아이들에게 빌려올 테니까요. 클라라 님."
"다들 자기들 먼저 쓰고 줄 텐데, 그러면 너무 늦어요."
클라라 님은 고개 숙인 내 멱살을 잡으며, 크게 뺨을 때리셨다.
"크, 클라라 님! 에이코 양……."
이쿠에 양이 어쩔줄 몰라 울먹였다. 반 아이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당장 달려오셔 클라라 님을 내게서 떼놓고 설교하셨다. 클라라 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잘못을 선생님께 호소하셨다.
나는 아픔을 넘어선 막연함이 엄습했다. 혹여나 클라라 님이 나를 버린다면? 내가 못나 다시는 말도 걸지 않으신다면?
나는 크게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다시는 없었을 것이다. 클라라 님과 이쿠에 양이 나를 떠날까 봐 너무 무서웠다.
이쿠에 양이 내 등을 쓸어주었다. 울음 그치기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이쿠에 양이 사탕도 주고, 물도 가져다주었다. 내가 진정할 때까지 손을 잡아주었다. 흐릿한 시야로 이쿠에 양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았던 기억.
"그만 뚝 하세요. 같이 사과하면 클라라 님도 용서해주실 거예요."
이쿠에 양이 내 눈물을 닦아주며 해주었던 말.
"제가 늘 함께 있을 테니까요오."
그 나른한 말의 온기.
마음이 동하며 두근거렸다.
“아…….”
눈이 확 떠졌다. 침대 위, 기억에서 쫓겨나 버린 기분 나쁜 감각.
순간적으로 회상이 끊긴 이유. 어릴 적의 어렴풋한 감정선이 아니라 너무나 뚜렷한 두근거림.
어린 이쿠에 양이 떠올랐다. 다독여주던 이쿠에 양, 함께 숙제를 할 때 인상을 찌푸리던 이쿠에 양, 오늘 보았던…… 도망치기 직전의 울먹이던 이쿠에 양의 얼굴. 내가 거절했을 때의 다시 울 것 같던 이쿠에 양의 얼굴. 편지에 빼곡하던 그 아이의 감정선.
“이거 어떡해.”
다시 한번 그 편지를 읽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귀까지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쿠에 양은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학교를 나왔다. 아침부터 나를 피하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낀 클라라 님은 의외로 태연하셨다. 우리 사이의 이상한 기류에 구태여 끼어들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 나는 이쿠에 양에게 인사만을 하고,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저기, 에이코 양.”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이쿠에 양은 포장도 채 뜯지 않은 내 초콜릿과, 그때 그 초콜릿 박스를 건넸다.
"……"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나는 말없이 이쿠에 양을 보았지만,
"……“
이쿠에 양도 역시 말없이,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잠시 서 있던 그녀는 "갈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전에는 편지만 보고 다시 닫았기 때문에 상자 속 초콜릿은 그야말로 새것이었다. 하나 입에 넣은 초콜릿은 어른스러운, 씁쓸한 맛이 났다.
'여태껏 밀크 초콜릿이었는데…….'
여태껏 이쿠에 양이 주던 그런 초콜릿은 아니라는 실감이 들었다.
별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걸까.
점심시간, 이쿠에 양이 옆에 앉은 클라라 님을 피했다. 클라라 님은 웃었지만, 당혹스러워 보이셨다.
“이쿠에 양, 왜 클라라 님을 피해요?”
“에, 에이코 양?!”
나는 울컥거려서 한마디 뱉어버렸다. 클라라 님이 일어나셔서 나를 제지하려 드셨지만, 나는 무시했다.
“저희 같이, 클라라 님을 따르기로 했었잖아요.”
이쿠에 양은 잠자코 듣는가 싶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먼저 시비 건 내가 압도될 정도로 곧게. 그리고 그 시선은 그대로 클라라 님께 옮겨졌다.
“더는 안 따라다닐 거예요. 클라라 양.”
“이쿠에 양!”
이쿠에 양의 팔을 잡았다. "무슨 무례를"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의 눈이 보였다. 그 싸늘한 눈빛 속에는, 물기로 울망진 눈동자가 있었다.
“절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내 손을 뿌리친 이쿠에 양은 빠른 걸음으로 반을 빠져나갔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아진 것을 알았다.
“대체 왜 그랬어요, 에이코 양!”
클라라 님이 안절부절못하며 말씀하셨다. 그런 말투로 해서 해결될 줄 알았냐며 채근하시며. 모든 게 옛날과는 정반대가 된 상황이었다. 나는 괴리감에 헤매며, 내 마음에 있는 뚜렷한 공포를 말했다.
"저는, 이쿠에 양과 지내다가 클라라 님이랑 멀어질까 봐 무서워져서."
클라라 님은 잠깐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날 보더니,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고 얼른 쫓아가 보세요."
“그렇지만, 클라라 님.”
“왜 그런 일로 무서워하는 거예요.”
클라라 님이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다고 두 분이 제 친구가 아닌 건 아닌데."
클라라 님의 다정한 말. 이쿠에 양이 나간 길에서 그 아이의 흔적이 보이는 듯 했다. 상상으로 그 아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간질간질한 기분. 나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금방 돌아올게요!”
터질 것 같은 무언가를 꼴깍 넘겨 삼키고, 나는 반을 뛰쳐나갔다. 반 아이들이 길을 터줘서 아주 쉽게 나갈 수 있었다.
복도 끝쪽 계단을 타려는 이쿠에 양이 보였다. 곧장 복도를 달렸다. 여태껏 살면서 교내를 이렇게 뛴 적이 있었을까? 올라가는 계단의 층계참에서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이 위층은 특별실만 모여있어 계단엔 아무도 없었다.
"이쿠에 양."
"그만 하세요."
이쿠에 양의 눈망울에서 결국 눈물이 조금 흘렀다. 이틀간 이쿠에 양의 우는 얼굴을 얼마나 본 건지.
나는 그 붉은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쿠에 양의 눈가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떼자, 깜짝 놀라 울지도 못하고 있는 이쿠에 양이 코앞에 있었다. 물기 져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놀라서 살짝 벌린 입이, 붉게 상기된 뺨이, 꼬옥 쥔 양손이 귀여워서. 그 모든 걸 꼬옥 안아주고 싶어졌다.
"에, 에이코 양?"
포옥 안은 이 몸이 나와 참 닮아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도 이쿠에 양을 좋아해요.”
“네?”
이쿠에 양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 이제 클라라 님이랑 같이 안 다닐 거예요.”
“상관없어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이쿠에 양은 잠깐 몸을 떼고, 나를 보았다. 훌쩍이는 호흡으로 겨우겨우 잇는 말.
"진짜요?"
"사실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건 알고는 있었지마안~"
이쿠에 양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 우는 온기가 사랑스러워서 자꾸만 안을 수밖에 없었다.
B.
아직 2월이라 그럴까. 학교는 벌써 노을에 물들어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아, 나는 크게 심호흡을 놓았다. 풀린 감정들이 화단을, 운동장을, 벽돌길을 뛰쳐 다니다 부딪히더니 팡하고 터져 사라졌다. 남은 것은, 아주 가볍고 상쾌한 마음뿐.
“클라라 님께…… 혼나버렸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이었다. 클라라 님과 함께 다니며, 그분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에이코 양이 조금 놀란 듯 나를 보았다. 그 의구심에 찬 푸른 눈과 마주치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바로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제가 말했지만, 정말 이게 혼난 걸까요?”
“혼난 거지요.”
우리에게 이렇게 쓴소리하시는 클라라 님은 처음이었다. 화가 아니라, 충고하는 듯한, 걱정했다는 듯한 말투. 여러모로 혼내며,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이제 저랑 안 놀아주시면 안 돼요. 두 분."이라고 투정하시던 클라라 님. 정말 좋은 분. 따를 이유가 있는 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이코 양은 웃음이 멈추고도, 입가에 미소가 그대로였다. 안도감이 느껴지는 얼굴.
“갈까요, 이쿠에 양.”
“네에.”
왠지 손이 잡고 싶어.
조심스레 뻗은 내 손을, 에이코 양이 깍지 껴버렸다. 조금 놀랐지만, 그 꽉 채워진 기분이 나쁘지만 않아서. 딱딱하고 충만한 존재감을 느끼며 우리는 걸어갔다.
"근데 제가 어릴 때부터 이쿠에 양 좋아하는 거 알고 계셨어요?"
"후후,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면 부끄러워하곤 하셨잖아요오."
나는 손을 잡은 채로, 상체를 조금 숙여 에이코 양을 올려다봤다. 행동이 조금 역동적이게 되어버렸지만, 이렇게 올려다볼 때면 눈에 띄게 당황하곤 했으니. 에이코 양은 이런 시선을 좋아하시는 걸까? 잠깐 아닌 듯 나를 바라보던 에이코 양은 얼마 못 가 예전처럼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뭔가 부끄러워졌다.
"이제 연인이니까."
"네에?"
"이, 이제 연인이니까 이런 일로 하나하나에 부끄러워하면 안 될 텐데 말이에요."
"아……."
에이코 양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더욱 꼬옥 쥐었다. 우리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걸었다. 서로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는 그냥 석양에 물든 탓이라고, 변명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