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노조] 지구멸망
커플_왼쪽에게_총이_있고_5분_내로_오른쪽을_죽여야_지구의_멸망을_막을_수_있다면_왼쪽은
"5분인기라."
노조미가 손대자, 빨간 탁상 시계의 불이 탁 켜진다. 5:00에 점멸했던 불은 4:59, 4:58을 지난다. 노조미는 여느 때와 같다. 노조미니까. 뮤즈의 정신적 지주인 노조미니까. 그녀가 이성을 잃고 운다거나, 화를 낸다는 것은 붕괴다.
그런 노조미가 총을 쥐고 있다. 그것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쿡 들이박는다.
에리는 멍하다. 노조미, 그녀, 무얼 하는가. 푸석 주저 앉은 에리, 의연하게 서 있는 노조미. 안돼. 에리의 바람소리. 안돼. 에리의 바람. 죽으면 안돼. 순간 노조미, 방아쇠를 쥐어짠다. 철컥.
에리의 동공이 더할 수 없게 커진다. 푸르던 눈알 속, 어둠을 그득 담고서야 그것은 잠긴다. 철컥, 철컥. 몇 번의 차가운 쇳소리.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니. 이 무신 차별이가. 그체?"
평생 신을 믿어본 노조미. 오늘만은 그 존재를 원망해본다. 노조미는 총을 내린다.
"벌써 1분이나 지난기라."
빨간 불이 3:47을 막 지났다. 에리는 시계를 본다. 시계가 갉아먹는 시간. 이미 다 포기해 힘이 없다. 땅을 두드리며 발광할 힘조차 남지 않다.
"에리치."
"에?"
말라비틀어진 에리의 목소리. 여느 때와 같은 노조미와 대조되어 더욱 비통하다. 에리는 이 일의 종막을 어찌 끝내야할지 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땅을 두드리며, 두드린 땅을 뛰어다니며, 악악 소리쳐가며 저항한 것.
에리는 여전히 주저 앉았고, 노조미는 서있다. 우위에 선 노조미, 그녀 에리에게 총을 겨냥한다. 에리와 노조미의 거리는 세엇걸음. 평범한 고등학생인 노조미란들 못 맞출 거리가 아니다. 에리의 동공은 커지지 않는다. 다만 동공같은 총구의 구멍을, 깊디 깊은 어둠을 본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철컥. 또 불발.
시계는 2:26. 헛된 시간이다. 노조미는 쇳덩이를, 주저앉은 에리에게 바닥으로 쓱 쓸려보내준다. 그 차가운 물체가 에리의 다리에 닿는다. 에리, 그녀 순간 소름 돋는다. 난생처음 만지는 살인 도구에.
에리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쥔다. 입 속으로 총구를 쑤셔넣는다. 어둠 속에, 어둠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철컥. 또한 불발. 에리는 웁웁 거리며 방아쇠를 마구잡이로 당겨댄다. 고장이나 나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시계는 어느덧 1:04.
에리는 입에서 총을 뺀다. 침으로 살짝 젖는다. 에리는 고개를 떨구고 운다. 총구도 떨궈져 지면에 숨을 죽인다. 노조미는 다만 무표정으로 본다. 시계는 어느덧 0:40을 지난다.
"에리치."
에리는 그 예쁜 호칭에 고개를 든다.
느릿느릿하던 시계의 점멸이 빨라지는 듯 하다. 0:37.
노조미는 웃고 있다. 교복 입은 그녀, 정말 소녀인가. 이런 상황에서 미소 짓는 그녀, 소녀인가. 형편없이 망가져 교복 니트 조끼 끝자락을 주먹쥐고 울먹이는 에리가 더 소녀 아닌가. 어째서 소녀가 소녀 아닌 사람을 죽여야하는가. 잔인치 않은가. 소녀가 살인 도구를 손에 쥘 필요 있는가.
예외없이 시계는 0:26
"노조미."
에리와 노조미의 거리는 세엇걸음. 평범한 고등학생인 에리란들 못 맞출 거리가 아니다. 에리는 고개를 처들고.
"노조미, 노조미, 노조미, 노조미."
형편없이 망가진, 말라비틀어진 에리의 목소리. 나직하다.
"에리치, 살아."
여느 때와 같고, 간결.
철컥, 하는 소리도 묻는 총성과 동시에 시계는 0:13에서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