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시작
"네, 됐습니다."
나는 극적으로 벌리던 두 팔을 머쓱하게 내리고 바로 섰다. 몇 개월간 잠도 못자며 준비한 게 허무할 정도로 짧다. 두 심사위원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잠깐 내 눈동자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짧게 내뱉고 나왔다.
문이 닫히고,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내 바로 뒤로 귀여운 인상의 키 큰 여자애가 들어갔다. 그땐 몰랐지만 바나나였다. 계단을 내려가 쓸데없이 넓은 교정으로 나오자, 먼저 마친 카오루코가 발로 꾹꾹 땅을 비비고 있었다.
"후타바항."
나를 알아본 카오루코가 말을 걸었다.
"잘 봤어요?"
"어, 그게. 뭐, 응."
"곤란하다구요. 후타바항이 합격 못하면."
내 턱까지 얼굴을 드민 카오루코는 얄궂게 웃었다.
"제 뒷바라지 해줄 사람이 없어지잖아요?"
"그래그래. 그렇게 못나게 말할 줄 알았다."
나는 카오루코의 뺨을 주욱 잡아당겼다. 매혹적이던 표정이 엉망으로 망가졌다. 카오루코가 제 입으로 '죄송하여요!'라고 빌 때까지.
"흥. 됐고, 어서 가요. 배고프니까."
"참나. 도쿄까지 와서 그 소리냐?"
"어머나? 꽃구경도 식후경이에요?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해도 말이지요."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밥이 먼저. 평소라면 그 말에 백 번 동의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배가 고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 학교를 나가는 게 더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얼른얼른"이라며 보채는 카오루코에게 끌려 나갔다.
"카오루코! 다시 말하지만, 네가 찾은 음식점 다는 못 가!"
"예? 도쿄까지 와서 그런 소리예요?"
"너 지금 내 말 따라했지?"
투닥투닥하며 조금 낯선 거리로 섞여들어간다. 카오루코의 뒷모습이 이 이름모를 거리에서 의지가 된다. 그렇지만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지나온 길을 힐끔 훔쳐보았다.
'과연 다시 올 수 있으려나.'
이 쓸쓸한 상념을 가진 게 나만이라고 생각하니, 퍽 카오루코에게 섭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