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극소녀 레뷰 스타라이트 5화와 7화 스포가 있습니다.
“저기, 뭐가 널 바꾼 거야?”
“약속이 있기 때문이야.”
“누구랑 무슨 약속인데?”
카렌 쨩, 나는 내심 그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나 봐.
“나는 히카리 쨩이랑 운명의 무대에 설 거야.”
메이스를 꽉 쥐었다. 그 무대에, 운명에 나는 없어? 응? 카렌 쨩.
***
“카렌 쨩, 일어나야지!”
이제는 당연해져 버린 잠꾸러기 룸메이트를 깨우는 일. 기숙사제 고등학교까지 와서 남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족들이 뭐라 할까? ‘역시 마히루는 어딜 가도 언니구나’라고 할머니는 살짝 웃음 지으며 자랑스러워하실지, ‘돌볼 동생이 없어지니 이젠 남을……’이라고 부모님은 질타하실지. 좀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머릿속에 가족들을 등 떠밀며 내쫓았다. ‘엄마, 아빠, 할머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제발요!’
잡생각을 하며 카렌 쨩을 흔들고 있자니, 얼굴이 점차 꾸물댔다.
“으음…….”
“수업 전에 아침 연습한다고 일찍 깨워달라고 했잖아.”
“알지마아안…….”
어떻게든 카렌 쨩을 일으켜 세우고, 씻고 오라고 말했다. 카렌 쨩은 덜 깬 목소리로 길고 가늘게 대답하고는 방을 나갔다. 방금 전까지 그 아이가 누워있던 이부자리를 정돈한다. 약간 따스함이 느껴진다. 카렌 쨩의 체온.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이불을 탁탁 털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침대의 머리맡 쪽으로 책상이 두 개 있었다. 각각 나와 카렌 쨩의 것. 공유하는 하나의 방에서, 각자 갖는 퍼스널 스페이스. 슬적 내 자리가 아닌 책상을 보았다. 다 먹은 과자봉지와 펼쳐둔 극본, 통일성 없이 모은 듯한ㅡ그래서 카렌 쨩다운ㅡ필기구꽂이, 손수건에 다정하게 놓여진 왕관 모양의 머리핀.
나는 그 머리핀이 좋았다. 붉은 왕관을 좇아가면 나도 왕족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머리핀을 집어 들었지만, 차마 해보려는 생각도 들지 않고 해처럼 반짝이는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그 반짝임의 끝에 보이는 느른함. 액자 역시 햇빛에 반짝였다. 어린 카렌 쨩과 소꿉친구가 서로에게 기대어 자는 사진.
2학년이 되고 카렌 쨩이 소꿉친구 얘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세이쇼는 힘든 학교였다. 연락도 없는 예전 친구를 태평하게 떠올리기엔 하루하루가 바빴다.
‘카렌 쨩이 세이쇼에 온 이유.’
1학년 때는 소꿉친구에 대해 자주 말했다. 카구라 히카리. 어릴 때 헤어졌는데, 같이 본 「스타라이트」가 좋아서 연기를 하게 되었다고. 같이 무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히카리 쨩도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다고. 나는 그때 ‘꼭 영화 같네’라고 했던가. 그리고 그는 ‘응! 운명이니까!’라고 대답했던가.
반 아이들이 점점 이곳에 온 목적을 잃어간다. 학교 커리큘럼을 간신히 소화하면서, 연기는 ‘해야 할 일’이 되어가는 것이다. 다만 갈망하고, 굶주리며, 목말라 찾아온 하고픈 일이. 그렇지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다. 연기가, 춤이, 노래가 취미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되면서, 연극은 떼레야 뗄 수 없는 자신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무대소녀가 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반짝임은 순간적으로 연소될 게 아니라, 길고 꾸준하게 이어져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다소 느슨해져도 괜찮아. 이유를 잊어버려도 괜찮아. 하루하루 잘 해 내가고 있으니까. 카렌 쨩이 입학 때처럼 열정에 가득 차지 않아도. 조금 늦게 일어나서 아침 연습 못 해도.
“카렌 쨩은 지금도 계속 반짝이고 있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환한 목소리였다.
***
주말이면 경비실에서 일주일 동안 모인 편지나 택배를 받는다. 급한 우편이라면 바로 받아보기도 하겠지만, 보통 다들 바쁘니까 느긋한 주말에 몰아받는다. 점심식사 전,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카렌 쨩과 나의 우편을 받아왔다. 운이 좋으면 가족에게 온 편지도 있지만, 대개는 쓸데없는 것이다. 광고라든가, 은행사라든가. 그냥 본가로 주소를 돌려둘걸. 후회되었다.
우리 방으로 돌아오자, 카렌은 매점에서 사 온 빵을 건네주었다.
“수고했어, 배달부 쨩!”
“카렌 쨩도 매점 다녀오느라 수고했어.”
이제 말하지 않아도 각자 뭘 먹는지 안다. 카렌 쨩이 사 와준 것은 내가 자주 먹는 감자 덩어리가 붙은 피자빵이었다. 카렌 쨩은 뭔가 신품인가? 평소엔 초코롤빵인데 오늘은 처음 보는 포장지의 빵이었다. 그래, 뭐 새로운 거 사 먹어볼 수도 있지. 나는 익숙한 맛을 물어뜯었다.
몇 안 되는 우편물을 훑어보던 카렌 쨩은 순간 외쳤다.
“히카리 쨩!”
“응?”
카렌 쨩은 편지지 봉투를 보여줬다. 로마자와 일본어로 세이쇼 음악학원의 주소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보낸 이에 주소는 영국, 런던이라는 영어 외에는 통 알 수 없는 외국의 지명명. 그러나 그 아래에 Kagura Hikari라는 이름이 주소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게 했다.
“답장이 오다니! 처음이야!”
“기쁘겠네, 카렌 쨩.”
카렌 쨩은 들뜨며, 하지만 전에 없이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봉투를 뜯었다.
무슨 내용일까? 거의 10년 만에, 꼬박꼬박 손편지를 써주던 친구에게 처음 답장을 할 때 마음은 대체 어떨까? 궁금했지만, 카렌 쨩이 너무 집중해서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마히루 쨩.”
카렌 쨩은 머리에 단 금속 왕관 핀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 영국에 갈래.”
***
“카렌 쨩, 진심이야?”
“응, 엄마아빠한테도 말했어. 방학 때 영국에서 입시 볼 거야.”
갑자기도 너무 갑자기였다. 왜? “카렌 쨩, 영어는?” 생각해보면 카렌 쨩, 국어랑 영어는 나보다 점수가 좋았다. 대본을 읽을 때도 그냥 감각으로 알만한 고어나 동사를 일일이 검색해서 자세한 뜻을 포스트잇으로 정리해두곤 했다. 카렌 쨩이 생각보다 언어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합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태평하게 웃었지만, 정말 진심이 어려있었다. 왜? 모국어를 포기하고 낯선 언어로 연기를 할 정도로 그 친구가, 카구라 히카리라는 아이가 소중한 거야?
겨우 편지 한 통으로 지금까지의 인생을 바꿀 정도로?
“아, 나 잠깐 교무실 좀 들를게. 마히루 쨩 먼저 교실 가 있어!”
카렌이 가볍게 계단 쪽으로 뛰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교실로 발걸음을 옮길 맘이 안 들었다.
아직 쉬는 시간일 텐데, 꼭 나밖에 이 학교에 없는 듯한 정적. 다음은 실기다. 다들 실기실이 있는 층으로 간 것이겠지. B반 애들도 이 시간엔 교과수업이 아닐 것이다. 이 층, 이 복도에는 나만 있는 게 맞았다.
“흐에엥~”
그 사실을 아니, 뭔가 더욱 발에 힘이 안 들어갔다. 벽에 설치된 핸드레일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웅크려있자. 어떻게든 힘이 나겠지. 친구가 없어졌다고 다음 수업에 결석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짧은 전자음들의 화음. 검은빛. 오디션. 돌아가는 기린 그림. 이상하다, 분명 핸드폰은 매너모드였을 텐데. 나는 찬찬히 일어서면서, 내게 가장 친숙한 말로 된 문장부터 읽어내려갔다.
“‘손에 넣으세요, 당신이 원하는 그 별을’……?”
***
“기린.”
귀여운 기린.
여동생이 기린을 너무 좋아해서 색연필만 쥐어주면 기린만 그려대던 게 기억났다. 덕분에 내가 그린 그림은 가을 들판도, 포슬포슬 익은 찐 감자도, 대회에서 탄 상패도 전부 갈색이었다.
그림처럼 키 큰 기린이 학교에 있었다.
“모든 이를 매료하는, 그런 스타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린이 사람 말을 한다는 사실보다도, 그 말 자체가 놀라웠다. 기린의 긴 속눈썹이 내 마음속에 슥 들어와 바닥을 훑는 것 같았다.
“모든 이를 매료하는…… 스타?”
“오디션에 참가하시겠습니까?”
기린의 표정이 비릿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매력적으로. 마치 스타처럼.
"당신도 눈부십니까? 이해합니다."
***
“나는 히카리 쨩이랑 운명의 무대에 설 거야.”
메이스를 꽉 쥐었다.
이 오디션에 분명 카렌 쨩은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다. 나의 환상이다. 오디션 의상이 잘 어울리는 카렌 쨩도, 능숙하게 칼을 다루는 카렌 쨩도, 기세등등하게 웃는 카렌 쨩도, 나와 부딪히는 붉은 검날도. 저 끔찍한 말도.
그 어떤 때보다 반짝이는 카렌 쨩조차도.
“꿈이야!"
메이스로 카렌 쨩의 단추를 가격했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대해 마지않던 꿈에서의 해방.
네 걸음 정도 떨어진 옆 침대에서 자는 카렌 쨩을 보며, 카렌 쨩의 알람시계가 울기 전까지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꿈이란 걸 안 게 어째서인지 더 섭섭했다. 그러나 이렇게 몰래 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심되는, 이상한 울음이었다.
***
"괜찮아! 모두 함께니까."
"쭉?"
"응!"
카렌 쨩은 오만. 나는 질투. 우리들의 첫 「스타라이트」에서.
불안에 떨던 제게 당신은 오만하게도 모두의 대답까지 '응'이라 대답했지요. 당신의 오만은 나를 질투의 여신으로 개화시켰어요. 당신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어디에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반짝임의 전부를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일부라도 좋아요. 당신이 반짝임의 상당수를 어린 아이가 장난치듯 빛을 향해 흩날리더라도. 그 밑으로 떨어진 자그마한 것들이 한낮의 땅에 남는다면요. 그런데 왜 당신은 밤으로 도망치려하시나요? 제가 쫓아갈 수 없는 어둠으로 뛰어들어 구태여 빛나시려하시나요? 내게 당신을 용서해주세요. 내게 당신의 일부를 용서해주세요. 이 학교에서만이라도 좋아. 학창시절의 당신만이라도 좋아. 진짜 배우가, 스타가 된 당신 곁에 머물 수 없더라도 이 시기만큼은. 너와 내가 한낱 학생인 지금은 괜찮잖아. 앞으로 남은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만은 괜찮잖아. 너와 대입을 준비하고 싶어. 너와 같은 극의 오디션을 보고 싶어. 너와 아직 아침 스트레칭을 하고 싶어. 너와 세이쇼 축제 101회 「스타라이트」를 개연하고 싶어. 너와 함께 하고 싶어.
***
바나나 쨩이 사실 뛰어난 아이인 것은 알고 있었다. 여유롭게를 넘어 자유롭게 반짝였으니까. 그랬던 아이가 왜 굳이 이런 오디션까지 보면서 스타를 갈망하는지... 사실 앞에서 보이던 자유로움은 거짓말이었는지... 이런 생각은 그른 것이었다. 어쨌든 난 그의 '스타'까지 빼앗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저기, 마히루 쨩. 뭐가 널 바꾼 거야?”
바나나 쨩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부러져 버린 장검 대신 온전히 남은 단검을 껴안은 채로.
“약속 때문이야.”
“대체 누구랑 무슨 약속…….”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튼은 그를 극의 뒤편으로 데려갔다. 그가 쓸모를 다했다는 양.
“카렌 쨩과 카구라 히카리의 약속.”
아주 차가운 독백이 무대를 채웠다.
“포지션 제로.”
「오디션을 종료합니다.」라는 웅장한 울림이 들려오고.
눈앞이 참으로.
“반짝여.”
***
“너희들 99기생의 상연작은 「스타라이트」야.”
“저 스타라이트 정말 좋아해요!”
카렌 쨩의 지친 기색 없는, 정말 순수한 목소리.
“저도요!”
나도 처음인 것처럼 꾸며 대답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스타라이트」를 호평했다. 이 학교에 입학할 정도의 학생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극. 수많은 극 중, 반짝임에 이끌린 여신들이 찢기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그 극이 우리 99기에게 주어진 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찢기는 것은 무대 위에서나 가능한 일일 테니까.
"다이바?"
끽하는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바나나 쨩이 일어섰다.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멸종이라도 선고받은 생물의 눈이었다. 바나나 쨩은 주목받은 시선을 소화시키려는 듯 잠시 가만있다가, "죄송합니다"하고 다시 앉았다.
왜? 왜 바나나 쨩은 알고 있어?
뒤돌아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는 여태까지 알던 '바나나 쨩'답게 생긋 웃었다. 우린 동료야, 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든든한 웃음이었다.
"플로라 역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옆자리의 카렌 쨩이 조금 큰 혼잣말을 했다. 예전에 나는 이 말에 뭐라고 했지? 새학기라 부끄러워 못 들은 척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카렌 쨩의 옆모습을 보았다. 눈안에 반짝임이 가득했다. 꼭 처음 보는 것 같은,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내 안에는 이젠 없는 반짝임. 그렇지만 나는 가슴 가득히 환한 볕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환하게.
***
카렌 쨩, 네가 얼마나 더 반짝반짝거리든.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할 한낮의 사랑의 성 안에 둘 테야.
너를 위해서 나는 가장 환한 한낮이 될게.
그러니까 카렌 쨩, 한낮이 되면 사라져버릴 자그마한 빛 따위 좇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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