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극소녀 레뷰 스타라이트 5화와 7화 스포가 있습니다.






저기, 뭐가 널 바꾼 거야?”

약속이 있기 때문이야.”

누구랑 무슨 약속인데?”


카렌 쨩, 나는 내심 그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나 봐.


나는 히카리 쨩이랑 운명의 무대에 설 거야.”


메이스를 꽉 쥐었다. 그 무대에, 운명에 나는 없어? ? 카렌 쨩.


***


카렌 쨩, 일어나야지!”


이제는 당연해져 버린 잠꾸러기 룸메이트를 깨우는 일. 기숙사제 고등학교까지 와서 남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족들이 뭐라 할까? ‘역시 마히루는 어딜 가도 언니구나라고 할머니는 살짝 웃음 지으며 자랑스러워하실지, ‘돌볼 동생이 없어지니 이젠 남을……이라고 부모님은 질타하실지. 좀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머릿속에 가족들을 등 떠밀며 내쫓았다. ‘엄마, 아빠, 할머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제발요!’

잡생각을 하며 카렌 쨩을 흔들고 있자니, 얼굴이 점차 꾸물댔다.


으음…….”

수업 전에 아침 연습한다고 일찍 깨워달라고 했잖아.”

알지마아안…….”


어떻게든 카렌 쨩을 일으켜 세우고, 씻고 오라고 말했다. 카렌 쨩은 덜 깬 목소리로 길고 가늘게 대답하고는 방을 나갔다. 방금 전까지 그 아이가 누워있던 이부자리를 정돈한다. 약간 따스함이 느껴진다. 카렌 쨩의 체온.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이불을 탁탁 털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침대의 머리맡 쪽으로 책상이 두 개 있었다. 각각 나와 카렌 쨩의 것. 공유하는 하나의 방에서, 각자 갖는 퍼스널 스페이스. 슬적 내 자리가 아닌 책상을 보았다. 다 먹은 과자봉지와 펼쳐둔 극본, 통일성 없이 모은 듯한그래서 카렌 쨩다운필기구꽂이, 손수건에 다정하게 놓여진 왕관 모양의 머리핀.

나는 그 머리핀이 좋았다. 붉은 왕관을 좇아가면 나도 왕족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머리핀을 집어 들었지만, 차마 해보려는 생각도 들지 않고 해처럼 반짝이는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그 반짝임의 끝에 보이는 느른함. 액자 역시 햇빛에 반짝였다. 어린 카렌 쨩과 소꿉친구가 서로에게 기대어 자는 사진.

2학년이 되고 카렌 쨩이 소꿉친구 얘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세이쇼는 힘든 학교였다. 연락도 없는 예전 친구를 태평하게 떠올리기엔 하루하루가 바빴다.


카렌 쨩이 세이쇼에 온 이유.’


1학년 때는 소꿉친구에 대해 자주 말했다. 카구라 히카리. 어릴 때 헤어졌는데, 같이 본 스타라이트가 좋아서 연기를 하게 되었다고. 같이 무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히카리 쨩도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다고. 나는 그때 꼭 영화 같네라고 했던가. 그리고 그는 ! 운명이니까!’라고 대답했던가.

반 아이들이 점점 이곳에 온 목적을 잃어간다. 학교 커리큘럼을 간신히 소화하면서, 연기는 해야 할 일이 되어가는 것이다. 다만 갈망하고, 굶주리며, 목말라 찾아온 하고픈 일이. 그렇지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다. 연기가, 춤이, 노래가 취미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되면서, 연극은 떼레야 뗄 수 없는 자신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무대소녀가 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반짝임은 순간적으로 연소될 게 아니라, 길고 꾸준하게 이어져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다소 느슨해져도 괜찮아. 이유를 잊어버려도 괜찮아. 하루하루 잘 해 내가고 있으니까. 카렌 쨩이 입학 때처럼 열정에 가득 차지 않아도. 조금 늦게 일어나서 아침 연습 못 해도.


카렌 쨩은 지금도 계속 반짝이고 있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환한 목소리였다.


***


주말이면 경비실에서 일주일 동안 모인 편지나 택배를 받는다. 급한 우편이라면 바로 받아보기도 하겠지만, 보통 다들 바쁘니까 느긋한 주말에 몰아받는다. 점심식사 전,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카렌 쨩과 나의 우편을 받아왔다. 운이 좋으면 가족에게 온 편지도 있지만, 대개는 쓸데없는 것이다. 광고라든가, 은행사라든가. 그냥 본가로 주소를 돌려둘걸. 후회되었다.

우리 방으로 돌아오자, 카렌은 매점에서 사 온 빵을 건네주었다.


수고했어, 배달부 쨩!”

카렌 쨩도 매점 다녀오느라 수고했어.”


이제 말하지 않아도 각자 뭘 먹는지 안다. 카렌 쨩이 사 와준 것은 내가 자주 먹는 감자 덩어리가 붙은 피자빵이었다. 카렌 쨩은 뭔가 신품인가? 평소엔 초코롤빵인데 오늘은 처음 보는 포장지의 빵이었다. 그래, 뭐 새로운 거 사 먹어볼 수도 있지. 나는 익숙한 맛을 물어뜯었다.

몇 안 되는 우편물을 훑어보던 카렌 쨩은 순간 외쳤다.


히카리 쨩!”

?”


카렌 쨩은 편지지 봉투를 보여줬다. 로마자와 일본어로 세이쇼 음악학원의 주소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보낸 이에 주소는 영국, 런던이라는 영어 외에는 통 알 수 없는 외국의 지명명. 그러나 그 아래에 Kagura Hikari라는 이름이 주소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게 했다.


답장이 오다니! 처음이야!”

기쁘겠네, 카렌 쨩.”


카렌 쨩은 들뜨며, 하지만 전에 없이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봉투를 뜯었다.

무슨 내용일까? 거의 10년 만에, 꼬박꼬박 손편지를 써주던 친구에게 처음 답장을 할 때 마음은 대체 어떨까? 궁금했지만, 카렌 쨩이 너무 집중해서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마히루 쨩.”


카렌 쨩은 머리에 단 금속 왕관 핀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 영국에 갈래.”


***


카렌 쨩, 진심이야?”

, 엄마아빠한테도 말했어. 방학 때 영국에서 입시 볼 거야.”


갑자기도 너무 갑자기였다. ? “카렌 쨩, 영어는?” 생각해보면 카렌 쨩, 국어랑 영어는 나보다 점수가 좋았다. 대본을 읽을 때도 그냥 감각으로 알만한 고어나 동사를 일일이 검색해서 자세한 뜻을 포스트잇으로 정리해두곤 했다. 카렌 쨩이 생각보다 언어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합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태평하게 웃었지만, 정말 진심이 어려있었다. ? 모국어를 포기하고 낯선 언어로 연기를 할 정도로 그 친구가, 카구라 히카리라는 아이가 소중한 거야?

겨우 편지 한 통으로 지금까지의 인생을 바꿀 정도로?


, 나 잠깐 교무실 좀 들를게. 마히루 쨩 먼저 교실 가 있어!”


카렌이 가볍게 계단 쪽으로 뛰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교실로 발걸음을 옮길 맘이 안 들었다.

아직 쉬는 시간일 텐데, 꼭 나밖에 이 학교에 없는 듯한 정적. 다음은 실기다. 다들 실기실이 있는 층으로 간 것이겠지. B반 애들도 이 시간엔 교과수업이 아닐 것이다. 이 층, 이 복도에는 나만 있는 게 맞았다.


흐에엥~”


그 사실을 아니, 뭔가 더욱 발에 힘이 안 들어갔다. 벽에 설치된 핸드레일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웅크려있자. 어떻게든 힘이 나겠지. 친구가 없어졌다고 다음 수업에 결석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짧은 전자음들의 화음. 검은빛. 오디션. 돌아가는 기린 그림. 이상하다, 분명 핸드폰은 매너모드였을 텐데. 나는 찬찬히 일어서면서, 내게 가장 친숙한 말로 된 문장부터 읽어내려갔다.


“‘손에 넣으세요, 당신이 원하는 그 별을……?”


***


기린.”


귀여운 기린.

여동생이 기린을 너무 좋아해서 색연필만 쥐어주면 기린만 그려대던 게 기억났다. 덕분에 내가 그린 그림은 가을 들판도, 포슬포슬 익은 찐 감자도, 대회에서 탄 상패도 전부 갈색이었다.

그림처럼 키 큰 기린이 학교에 있었다.


모든 이를 매료하는, 그런 스타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린이 사람 말을 한다는 사실보다도, 그 말 자체가 놀라웠다. 기린의 긴 속눈썹이 내 마음속에 슥 들어와 바닥을 훑는 것 같았다.


모든 이를 매료하는…… 스타?”

오디션에 참가하시겠습니까?”


기린의 표정이 비릿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매력적으로. 마치 스타처럼.

 

"당신도 눈부십니까? 이해합니다."


***


나는 히카리 쨩이랑 운명의 무대에 설 거야.”


메이스를 꽉 쥐었다.

이 오디션에 분명 카렌 쨩은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다. 나의 환상이다. 오디션 의상이 잘 어울리는 카렌 쨩도, 능숙하게 칼을 다루는 카렌 쨩도, 기세등등하게 웃는 카렌 쨩도, 나와 부딪히는 붉은 검날도. 저 끔찍한 말도.

그 어떤 때보다 반짝이는 카렌 쨩조차도.


꿈이야!"


메이스로 카렌 쨩의 단추를 가격했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대해 마지않던 꿈에서의 해방.

네 걸음 정도 떨어진 옆 침대에서 자는 카렌 쨩을 보며, 카렌 쨩의 알람시계가 울기 전까지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꿈이란 걸 안 게 어째서인지 더 섭섭했다. 그러나 이렇게 몰래 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심되는, 이상한 울음이었다.

 

***

 

"괜찮아! 모두 함께니까."

"쭉?"

"응!"

 

카렌 쨩은 오만. 나는 질투. 우리들의 첫 스타라이트에서.

불안에 떨던 제게 당신은 오만하게도 모두의 대답까지 '응'이라 대답했지요. 당신의 오만은 나를 질투의 여신으로 개화시켰어요. 당신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어디에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반짝임의 전부를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일부라도 좋아요. 당신이 반짝임의 상당수를 어린 아이가 장난치듯 빛을 향해 흩날리더라도. 그 밑으로 떨어진 자그마한 것들이 한낮의 땅에 남는다면요. 그런데 왜 당신은 밤으로 도망치려하시나요? 제가 쫓아갈 수 없는 어둠으로 뛰어들어 구태여 빛나시려하시나요? 내게 당신을 용서해주세요. 내게 당신의 일부를 용서해주세요. 이 학교에서만이라도 좋아. 학창시절의 당신만이라도 좋아. 진짜 배우가, 스타가 된 당신 곁에 머물 수 없더라도 이 시기만큼은. 너와 내가 한낱 학생인 지금은 괜찮잖아. 앞으로 남은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만은 괜찮잖아. 너와 대입을 준비하고 싶어. 너와 같은 극의 오디션을 보고 싶어. 너와 아직 아침 스트레칭을 하고 싶어. 너와 세이쇼 축제 101스타라이트를 개연하고 싶어. 너와 함께 하고 싶어.


***

 

바나나 쨩이 사실 뛰어난 아이인 것은 알고 있었다. 여유롭게를 넘어 자유롭게 반짝였으니까. 그랬던 아이가 왜 굳이 이런 오디션까지 보면서 스타를 갈망하는지... 사실 앞에서 보이던 자유로움은 거짓말이었는지... 이런 생각은 그른 것이었다. 어쨌든 난 그의 '스타'까지 빼앗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저기, 마히루 쨩. 뭐가 널 바꾼 거야?”

 

바나나 쨩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부러져 버린 장검 대신 온전히 남은 단검을 껴안은 채로.

 

약속 때문이야.”

대체 누구랑 무슨 약속…….”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튼은 그를 극의 뒤편으로 데려갔다. 그가 쓸모를 다했다는 양.


카렌 쨩과 카구라 히카리의 약속.”


아주 차가운 독백이 무대를 채웠다.


포지션 제로.”


오디션을 종료합니다.라는 웅장한 울림이 들려오고.

눈앞이 참으로.


반짝여.”


***


너희들 99기생의 상연작은 스타라이트.”

저 스타라이트 정말 좋아해요!”

 

카렌 쨩의 지친 기색 없는, 정말 순수한 목소리.


저도요!”

 

나도 처음인 것처럼 꾸며 대답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스타라이트를 호평했다. 이 학교에 입학할 정도의 학생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극. 수많은 극 중, 반짝임에 이끌린 여신들이 찢기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그 극이 우리 99기에게 주어진 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찢기는 것은 무대 위에서나 가능한 일일 테니까.

 

"다이바?"

 

끽하는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바나나 쨩이 일어섰다.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멸종이라도 선고받은 생물의 눈이었다. 바나나 쨩은 주목받은 시선을 소화시키려는 듯 잠시 가만있다가, "죄송합니다"하고 다시 앉았다.

? 왜 바나나 쨩은 알고 있어?

뒤돌아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는 여태까지 알던 '바나나 쨩'답게 생긋 웃었다우린 동료야, 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든든한 웃음이었다.


"플로라 역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옆자리의 카렌 쨩이 조금 큰 혼잣말을 했다. 예전에 나는 이 말에 뭐라고 했지? 새학기라 부끄러워 못 들은 척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카렌 쨩의 옆모습을 보았다. 눈안에 반짝임이 가득했다. 꼭 처음 보는 것 같은,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내 안에는 이젠 없는 반짝임. 그렇지만 나는 가슴 가득히 환한 볕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환하게.


***


카렌 쨩, 네가 얼마나 더 반짝반짝거리든.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할 한낮의 사랑의 성 안에 둘 테야.

너를 위해서 나는 가장 환한 한낮이 될게

그러니까 카렌 쨩, 한낮이 되면 사라져버릴 자그마한 빛 따위 좇지 말아 줘.

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

믿는 마음이 너의 마법.’

 

샤리오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못 믿는 건 아냐.

 

 

, 다이애나!”

 

다이애나가 뒤를 돌아본다. 희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살짝 주위를 맴돌고, 그 푸른 눈이 나를 응시한다. 몇 번이고 마주한 적이 있는 그 눈이. 아주 반가운 사람 보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음보는 사람 보는 것 같지도 않다. 싫어하는 사람을 보는 눈은, 더 아니다.

 

나는 아주 잠시 머릿꽁지가 쭈볏 설 정도의 냉기를 느낀다.

 

무슨 일이죠?”

 

되묻는 그 낯익은 목소리에 바로 등뒤로 쫙 정렬하고 있던 냉기의 정령들이 내 몸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얼굴이, 그리고 온몸이 화악 달아오른다.

 

, , 그게. , 뭐였더라…….”

 

별일이 아니라면 그만 가보겠어요. 다음 수업 준비를 해야하니까. 앗코도 놀지만 말고 미리 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 다이애나는 역시 부지런하구나~”

 

다이애나는 살짝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당연하죠. 누구누구 씨랑 다르게.”

 

다이애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원래 가던 쪽으로 걸어나갔다. 내가 왔던 방향과 반대로.

 

다이애나는 늘 그렇다. 내가 다이애나를 쫓아가는 방향에서 반대로 걸어간다. 내게로는 걸어오지 않아. 그녀의 빛나는 머리카락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가만 서서 바라본다.

 

믿는 마음이 나의 마법…….”

 

그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야. 그냥…….

 

나는 뭘 어쩌면 좋지?”

 

 

 

수시, 요즘 앗코 이상하지 않아?”

 

롯테가 몸을 낮추며 소근거린다. 아니 소리만 낮추면 되는데 왜 몸까지 낮추는 거야? 덩달아 나도 몸을 낮출 수 밖에 없잖아. 이게 더 수상해보일텐데.

 

앗코라면 뭐, 샤리오의 카드라도 잃어버린 거 아니겠어?”

 

정말~ 왜 맨날 수시는 그렇게 진지하지 못하게…….”

 

롯테가 투덜투덜 보기좋게 실례되는 말만 콕콕 집어 말한다. 롯테는 평소엔 조용한데 가끔 이상한 바람이 들면 엄마처럼 조잘대는 나쁜 버릇이 있다. 이런 롯테는 말리기 귀찮은데. 묘하게 말도 평소보다 잘하게 되고.

 

……그러니까 수시가 맨날 다른 사람한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오래된 문이 끼익거리고 앗코가 들어온다. 문이 걸칠 정도로의 힘으로만 밀고, 앗코는 아무런 말 없이 자기 침대에 눕는다. 평소의 앗코는 옆방에서 찾아와 한 소리 할 정도로 쾅 소리나게 문을 닫는데 말야. 롯테가 신경써서 불 꺼줄까? 물어도 대답이 없다. 베개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고 일어나지 않는다.

 

저거…… 죽은 건 아니겠지?’

 

숨 막힐텐데 잘도 저러고 누워있는다. 미동도 없음.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좀 이르지만 잘 시간처럼 되어버린다. 롯테도 자려는 듯 부산스럽게 책상 위를 정리한다싶더니 침대에 앉아있는 내 눈을 빤히 본다. 눈으론 날 보며 고개짓으로는 문을 홱홱 가리킨다.

 

그 정돈 말로 해도 되지 않냐고…….‘

 

먼저 문 밖으로 나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조금 뒤에 롯테가 따라나온다.

 

역시 이상해.”

 

그러니까 뭐가.”

 

뭐긴 뭐야, 당연히 앗코지. 방금 봤잖아. 그 모습. 분명 무슨 일이 있던 걸 거야.”

 

? 롯테는 정말 모르는 건가?

 

하긴 이 순진한 북유럽 아가씨는 은근히 그런 쪽으론 잼병이니까.

 

귀찮으니 그냥 말해줄지, 조금 더 골려볼지 고민하던 사이 롯테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앗코도 역시 들은 걸까. 그 소문.”

 

지금 뭐 소문 도는 게 있었어?”

 

수시 정말 몰라? 하며 롯테가 한층 더 목소리를 죽여 말한다.

 

다이애나가 학교 관둔다는 소문이 돌고 있잖아.”

 

…….”

 

그것 때문에 풀 죽은 거면 정말 도와줄 수도 없고…….”

 

우리방 틈에서 새어나온 빛이 길게 복도를 가로지르지만 저 끝의 달빛까지는 닿지 못한다. 중간에 끊긴 빛은 한없이 미약해보인다. 그 빛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고 있었다.

 

역시 남의 연애사는 관련되는 게 아니네.’

 

 

 

듣기 싫은 이야기는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기 마련이다.

 

캐번디쉬가가 어떻게 됐길래 그래?”

 

영국 정세 자체가 불안하잖아.”

 

아무리 뿌리 박고 있다고 해도 요즘 시대에 순혈 마녀집안이 있을만한 곳이 어딨겠어.”

 

걔 아니더라도 영국 애들 많이 본가로 돌아가던데.”

 

근데 지금 상황에 돌아가봤자…….”

 

눈을 콱 감고 발을 쿵쿵 굴리며 걷는다. 그 소리로 조금이라도 안 들을 수 있게끔.

 

그렇게 걸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잖아요.”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다이애나. 주위의 수근거림이 거짓말처럼 멎고 조용하다. 롯테가 근처에 있다면 냉기의 정령들이 내 몸으로 달려드는 걸 볼 수 있을 거다. 평소와 다름없는, 파랗게 착 가라앉은 눈동자가 내 질척한 속내를 꿰뚫어볼 것 같다.

 

더 서있다간 얼어붙을 거야.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다이애나의 팔을 뿌리친다. 다이애나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고만 있다. 나는 한 걸음 뒷걸음질 치다가 곧바로 몸을 돌려 뛰쳐나간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정말 나는 뭘 어떻게 해야.

 

 

 

그 이후로 일부러 다이애나를 피해다니고 있다. 다이애나 본인만이 아니다. 다이애나와 관련된 화제나 이야깃거리는 전부 피하고 있다.

 

그래설까. 롯테가 이상하게 신경써주는 게 눈에 보인다. 수시는 그대로지만. 그 관심이 되려 불편해서 기숙사 소등시간 전까지의 저녁과 밤 사이, 요즘은 빗자루 주행로에 올라와있곤 한다. 밤이 되어 바람이 쌀쌀해 후드를 뒤집어쓰면, 마치 별이 흐르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 천천히 어둠을 더해가는 저녁과 밤을 지나는 시간. 그 사이로 아주 선명한, 빗자루 끄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이끌며 다가온 인영이 말을 건다.

 

여기서 보는 것도 두번째네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후드를 걷고 그 모습을 확인한다.

 

다이애나?”

 

정해진 시간 외에 이곳은 출입금지라고 말하는 것도 두번째예요.”

 

2주만에 얼굴을 맞대다곤 믿기지 않을정도로 평소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한다.

 

그러는 다이애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다이애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높은 곳은 역시 바람이 많이 분다. 나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쓴다. 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밝게 마도석이 빛나고. 바람이 귀 쪽의 천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단지 불어가는 시간이 나와 다이애나 사이를 지나간다.

 

높은 데를 정말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높은 곳은 좋아해.”

 

비꼬는 투에 나는 꾸밈없이 답한다.

 

샤리오는 늘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나도

 

오늘까지도 샤리오, 샤리오.”

 

다이애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떨리는 목소리. 다이애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일어서 다이애나 곁으로 다가간다. “저어, 다이, 애나?” 나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단 세 발자국이, 아직 남은 그 세 발자국이 다이애나와 나의 간격을 채운다.

 

다이애나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나처럼, 주행로를 부술 듯 발을 굴리며, , , . 코앞까지 다가온 다이애나가 내 어깨를 콱 잡고 고개를 든다. 희번득 뜬 눈이 분노에 일그러져 탁하다. 다이애나답지 않아.

 

만일 떨어지면 빗자루도 못 타면서.”

 

?”

 

이대로 여기서 떨어지면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다이애나는 곧 쓰러질 사람처럼 다시 고개를 떨구고 내 두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달달 떨리는 손에서 전해지는 악력이 아프다.

 

당신은 왜 늘 그런 근거없는 자신감만 있죠?”

 

다이애나, 말이 심하…….”

 

"내가 가는 거 뻔히 알면서도 도망만 치고 있고! 그 잘난 자신감은 어디갔죠?"

 

몸 전체가 일제히 굳는다. ", 도망이라니 그런" 변명을 해보지만 혀도, 생각도 딱딱하다. 결국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몇 초간의 정적. 아주 작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난 것 같다. 그리고나서 바로 다이애나가 나를 가볍게 밀친다.

 

"이제 됐어요.“

 

티아 플뢰레, 깔린 목소리에 반응하여 다이애나의 빗자루가 그대로 부유한다. 다이애나의 손아귀까지 날아오른 빗자루는 가만히 주인의 명을 기다린다.

 

앗코 같은 거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다이애나는 그대로 빗자루에 탄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유려한 솜씨로 주행로를 타고 날아오르는 빗자루가, 어린시절 읽은 동화책 마녀의 모습처럼 달을 가로지른다.

 

…….”

 

방금까진 내게 걸어와주던 다이애나가, 저 앞도 아니고, 아득히 위로, 달로 사라져간다.

 

믿는 마음이, 나의 마법.”

 

샤리오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이제라고 그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내 마법은……?"

 

 

 

그 뒤로 다이애나를 보는 일은 없었다. 확정된 사실은 더이상 소문으로도 돌지 않는다. 수업에서 선생님들의 질문에 답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손으로 꼽을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깨달았다. 정말 다이애나가 사라지는구나.

 

다이애나가 언제 갈까. 분명 무의식중에, 언뜻은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른다. 억지로라도 기억하지 않았으니까.

 

샤이니 로드……. 뭔가 최근엔 안 들여봤네.’

 

침대 매트리스 사이에 쑤셔넣어뒀던 샤이니 로드를 꺼내본다. 7개의 보석에 음울한 7명의 내가 비친다. 보석들은 투명하지만 스스로 빛나지는 않는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봤을 땐 조금 더 빛났던 것 같은데 말야.“

 

샤이니 로드를 창문가 쪽으로 들어올려 태양빛에 비춰본다. 그러자 보석에 비친 것은…….

 

아슬라 선생님?”

 

나는 고개를 돌려 아슬라 선생님을 본다. 언제 문이 열렸는지, 선생님은 언제부터 거기 서 계셨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캐번디쉬 양이 가는 거, 알고 있니?“

 

햇볕 사이로 반짝이는 먼지들이 춤추듯 올라가고 내려가길 반복한다. 흰 빛 사이를 맴도는 반짝이는 것들. 눈앞을 맴도는 흰 머리카락. 아찔해진다. 방금 볼 수 없어질 것을 보고야 말았다.

 

카가리 양, 정말 안 갈 거야?”

 

"선생님, 제발 그만 좀.“

 

아슬라 선생님의 붉은 눈이 반짝인다. 아주 잠깐 왠지 모르게도 그 모습이,

 

아슬라 선생님 분명 저번에.”

 

샤리오와 닮아서.

 

샤리오에 대해 안다고 하셨죠?”

 

, 으응? 그건…….”

 

선생님은 당혹스러워하시다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곤 있지.”

 

“‘믿는 마음이 나의 마법’.”

 

……샤리오가 했던 말이지?”

 

선생님은 이 말 싫어하세요?”

 

아니 싫어하진 않아. 오히려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 마법은 믿음을 전제로 이뤄지는 거니까.”

 

아슬라 선생님은 내 눈을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쉰다.

 

라는 건 너무 좋은 말만 하는 티가 나니?”

 

저는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샤리오를 동경해서, ‘믿는 마음이 나의 마법이라는 말에 동경해서.”

 

그래, 맞아. 그 말을 좇아서.

 

어째서인지 넘치는 감정을 주워담을 수가 없다. 감정은 물처럼 녹아내려 얼굴에서, 눈에서, 코에서 흘러난다. 감정을 다시 찾으려고 끌어들여보지만 훌쩍임에 목소리만 뭉개진다.

 

그런데 저, 이제는, , 믿으면 좋을, , 모르, 겠어요.”

 

선생님은 내 두 손을 잡아준다.

 

카가리 양, 들어줄래?”

 

손끝으로 훨씬 뜨거운 체온이 맞닿는다.

 

나는 사실 이제 아무것도 믿지 못한단다.”

 

왜요?”

 

믿는 데엔 이유가 있지만, 믿지 못하는 데엔 이유가 없는 법이지.”

 

…….”

 

난 운명과 마법에 순응하고 있지만.”

 

선생님이 오른손을 들어 내 얼굴을 쓸어내린다. 뜨거운 기운이 지나가고 기분 좋은 시원함이 눈가를 맴돈다.

 

하지만 카가리 양은.”

 

선생님이 탁 튕겨낸 눈물방울들이 나와 선생님 주위로 모이더니,

 

믿음만으로 여기까지 온 카가리 양은."

 

형태보다도 반짝임을 갖고 제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튀어오른다. 돌고래, 가오리, , 조랑말,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믿고 있던.

 

나와는 다를 거라고 생각한단다.”

 

사람의 모습에 팔 대신 날개를 가진 하피. 하피 하나가 내 앞까지 날아와 콧잔등을 건들이고 다른 동물들과 함께 창문가로 날아올라 빛처럼 사라진다.

 

선생님! 그 마법은!”

 

선생님은 미소지으며 말한다.

 

샤이니 로드를 보렴.”

 

샤이니 로드의 일곱 보석이 빛나고 있다. 선생님은 내 손을 놓는다. 어느샌가 선생님의 손이 뜨겁게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온몸이 화악 달아올라, 마치 몸에 달라붙고 있던 냉기의 정령들이 전부 점프해서 내려간 것 같은 느낌.

 

후회하기 전에 쫓아가렴.”

 

녹트 오페 오든 플레토르, 그 용기에 힘입어 나는.

 

 

샤이니 아르크!”

 

 

그래, 내가 믿는 것은.

 

 

다이애나!”

 

! , 앗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다이애나의 위에 올라타있었다. 옆으로 여행용 가방이 구르고 있고, 다이애나는 막 채비를 서두르는 사람처럼 바깥 외출우의를 입었다.

 

나 이제 알게 됐어!”

 

"?"

 

너를 믿는, 이 두근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이, 바로 나의 마법이라는걸!”

 

?”

 

"그러니까 네가 가더라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꼭! 다이애나가 있는 곳까지 쫓아갈테니까!"

 

다이애나가 어이없다는 듯 가만 있더니,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

 

갑자기 와선 무슨 소릴 하나 싶더니! 왜 하필 가는 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




((죄송합니다 원고 쓰다 말았습니다 ^_ㅠ 과거의 절 원망하십시오)

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

더워~”

앗코가 침대에 가로로 누워 하반신은 벽에 올리고, 등에서 목까지는 측면에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꼭 녹은 것처럼 보였다. 7월 일본의 더위는 사람마저 녹여버릴 것 같았다. 작은 방 안에 두 개의 구식 선풍기가 등지고 돌아갔다. 인공적인 바람은 전혀 시원하지 않았고, 갑갑한 갈색머리만 휘날리게 할 뿐이었다.

다른 한 선풍기는 거의 롯테 쪽으로 기울어있었다. 수시는 그 풍향에서 살짝 비껴나와, 나무의자 위에 다리를 모으고 웅크리듯 앉아있었다. 두 선풍기는 서로 경쟁을 하듯 쉴새 없이 탈탈거렸고, 시원해지기는 커녕 선풍기에서 열기가 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더운데 축제가 열리긴 하는 거야?”

수시가 무릎에 고개를 괴고 물었다. 얼굴을 덮은 긴 머리가 더울 법도 한데, 치명적인 동남아의 날씨에 익숙한 탓인지 하는 말에 비해 그다지 힘들어보이진 않았다.

덥다고는 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어.”

반면 롯테는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도 부채를 부단하게 흔들었다. 일본행 비행기 탔을 때 앗코가 일본에서는 너무 더워서 여름에 사람 여럿 죽는다구~’라고 겁줬던 게 순수히 농담만은 아니라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으음, 해 지면 좀 나을테니까 이정도 덥다고 마츠리가 열리지 않지는…….”

웅얼거리며 대답하던 앗코가 갑자기 축 쳐졌다. 롯테가 걱정스러운 듯이 앗코?’하고 불렀으나 고개 드는 일 없이, 죽은 개처럼 눈을 감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 찔러나봐야하나 싶을 즈음에,

똑똑하고 창문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났다. 내다보니 등으로 연갈색 털이 난 올빼미가 있었다. 일본에, 그것도 이런 주택가 한복판에 올빼미가 창문을 두드릴 이유라곤 하나뿐이었다. 롯테가 올빼미를 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마녀의 사역마? 그것도 일본까지?” 전서구의 발에는 고급스러운 통이 들려있었다. 통 안의 편지는 이동중에 적은 것인지 흔들렸지만 이 정중한 글씨는, “이거 다이애나한테서 온 거야.” 롯테가 놀라며 말했다. “별곳까지 편지를 보내네.”라며 수시는 의자에서 내려와서 롯테가 쥔 편지를 같이 보았다.

앗코는 그때까지도 더위에 취해 눈을 감고, 두 친구 중 누구랄 것 없이 질문을 던졌다.

다이애나가 뭐래?”

다이애나도 일본에 있는 모양이야. 여행 왔다고 하네.”

? 다이애나가?!”

앗코가 단숨에 일어나 허리를 비틀어 둘을 보았다. 루나노바의 2층 침대였다면 머리를 부딪혀 한참을 굴렀을 것 같은 기세로.

진짜?”

롯테가 편지를 건내주자 앗코는 잽싸게 받아들어 읽어가기 시작했다. 편지는 유려하다고 할만한 것 없이 짤막하고 단순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름휴가로 한나, 바바라와 함께 일본에 왔다는 것. 이 무더운 기후가 앗코, 당신과 꽤나 닮았다는 것. 여기가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이 더위 탓에 당신이 기억나 편지했을 거라는 것. 도착해서 호텔에 묵고는 있으나 크게 잡아둔 일정은 없다는 것. (그러나 곤란한 어투라기보다는 그냥 그렇다는 사실을 적은 느낌이었다. 롯테는 하긴 그 셋이라면 어딜 가더라도 힘든 일 없이 지낼 것 같긴 하네.”라며 쿡쿡 웃었다.) 마지막으로 루나노바에서 돌아갈 적에 향수병 걸리지 않도록 고향에서 잘 지내고 다시 보자는 얘기였다. 정중한 편지가 딱딱해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것이 다이애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앗코는 뭔가 뿌듯하기도 했고 쑥스럽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변하고 있었다.

포스터를 떼어내 다른 곳보다 조금 더 하얀 벽면을 앗코는 노려봤다. 이곳에 포스터가 없는 것만 빼면 자신이 떠나기 전과 다를 것이 없는 벽이었고, 방이었다. 다만 다를 것이 있다면 두 친구들정도. 집을 떠나고 꼬박 반 년. 루나노바도 여름방학을 맞아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껏 처음 보내는 여름방학을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 은근히 같이 일본에 놀러가지 않겠냐고 권한 것이 시원스레 좋다고 해주어서 앗코는 내심 놀랐다. 특히 수시는……

여름에만 캘 수 있는 버섯을 캐야한다고 할 것 같았는데 말야.’

그 다이애나가 해외여행이라니 의외네.”

수시가 곁눈질로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다이애나가 일본에 온 게 정말 순수하게 해외여행의 목적일까? 이 나라의 기후가 앗코와 닮았다라.

정말 어떻게 그런 낯뜨거운 소리를 본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쓸 수 있는 건지.’

좋아!! 우리 다이애나랑 만나자!”

어떻게?”

수시가 되묻자 앗코가 그 둥근 눈을 더 둥그랗게 떴다. “?”

우리는 사역마도 없고, 지금 다이애나가 있는 장소도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을 한다는 거야.”

그거야 다이애나의 사역마를 쓰면 되…….”

롯테가 하고 창문을 닫으려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부엉이는 져가는 노을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앗코는 …….”하고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는?” 수시가 굳이 싶을 정도로 되묻자 앗코가 울먹였다.

롯테에에…… 어떻게 안 될까?”

바바라랑 연락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롯테가 의자에 걸려있던 가방에서 마력구를 꺼냈다. 마력구에는 비치는 것 없이 투명하게 있었다. ‘일본은 정말 마력이 없구나…….’ 이정도까지 마력구가 깨끗해진 건 처음이라고 롯테는 생각했다. 늘 곁에 있던 정령도 조금 기운이 없어보였다.

그러고 보니.”라며 롯테가 운을 띄었다. “바바라가 일본에는 나이트폴 2차 창작 굿즈가 많다고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근데 롯테는 왜 말 안 했어?”

나는 원작파니까 그렇게 흥미있진 않아서.”

롯테의 안경이 둔탁하게 반짝였다. 나이트폴 얘기만 나오면 롯테는 이렇게 진지해지곤 했다.

수시가 툭툭 앗코의 옆구리를 쳤다. “해지고 있어.” 그 말에 새삼스레 앗코와 롯테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난리를 피우던 통에 시간이 꽤 지나 주황빛도 점점 파래져 방이 어둑어둑했다. 바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츠리의 시작이었다.

 


롯테가 와아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이 근방에서는 가장 큰 마츠리라는 앗코의 설명답게 규모가 상당했다. 이렇게 대규모의 지역사회 축제를 처음 본 롯테는 동양의 묘한 단결력에 감동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수시는 옛날에 멀찍이서 봤던 자기 동네의 축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의 수시는 환한 축제의 불빛을 등지고 어두컴컴한 산속으로 들어갔다. 부럽다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 불빛이 지금은 머리칼로 가린 눈까지 부실 정도로 가까이 있다. 온곳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 여름다운 맛이 나는 달아오른 밤공기. 앗코가 재촉한다. “얼른 둘러보자!”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을 중명하듯이 마을 사람들은 앗코를 볼 때마다 꼭 한마디씩 말을 걸었다. 이국적인 풍경에, 짧게 짧게 알 수 없는 단어를 말하는 앗코는 외국인이었다. 롯테는 그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둥글고 활기가 띠는, 그 익숙한 얼굴이 가장 이국의 것임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이국의 풍경에 이국의 글자들…… 이따금 수시와 앗코가 나누던 쪽지 속 한자라는 글자들이 어지러이 흩어져있었다이 풍경이 낯설기는 수시도 마찬가지였다. 마츠리의 묘하게 붉은 빛깔의 조명이 성적으로 추잡스럽게 느껴졌다. 습한 바람이 더해져서 더욱 불쾌했다.

잠깐, 저 머리는.”

앗코가 가늘게 눈을 뜨고 짙은 머리의 사람들 사이에 섞여 단연 눈에 띄는 백금발을 유심히 보았다. 백금색뿐만 아니라 파스텔톤의 초록색도 굴곡지어 내려가있는 저 머리는.

다이애나?!”

백금발의 사람이 앗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마 한쪽으로 일본풍의 작은 여우가면을 쓴 소녀의 놀란듯이 살짝 확장된 저 파란 눈방금 산 듯 어색하게 링고아메를 들고 있는 하얀 손은 누가 봐도 다이애나의 것이었다.

앗코! 이런 데서?”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어쩐 일이야. 여긴 관광지도 아닌데.”

다이애나는 바바라를 따라 오긴 했는데, 한나와 바바라는 먼저 나가버리고 자신은 갈 곳이 없어져 일단 사람 많은 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런 이유치곤 나름 본격적으로 축제를 즐기는 것 같아 앗코는 뭔가 웃음이 나왔다.

왜 웃으시는 거죠?”

다행이야! 다이애나가 일본을 맘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다이애나는 별소리 없이 가볍게 웃었다. 그런 웃음이 많아진 것도 다이애나의 변화 중 하나였다.

 그렇게 넷은 축제를 돌아다녔다. 다이애나가 샀던 링고아메를 롯테와 앗코가 조금 뺏어먹는 대신 타코야키와 야키소바를 사서 나누어먹었다. 수시는 일본의 간장소스가 싫지 않다며 야키소바를 상당히 좋아했다. 

"저거 나이트폴 아냐?"

수시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공기총 부스가 있었다. 마츠리하면 뺄 수 없는 부스지만 청소년보다는 어린 아이가 많은 마을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었다. 옆에 앉은 주인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선반에 늘여진 인형 같은 상품 중에 당연 눈에 띄는 것은 나이트폴을 그대로 본따 만든 네모진 책모양 쿠션이었다. 순간 롯테가 눈을 반짝이며 부스의 카운터를 쾅 쳤다. 그 기세에 놀란 아저씨도 화들짝 일어섰다.

"어, 어서옵쇼!"

"앗코 나 이거 할래!"

"알았으니까 진정해……."

기세 좋게 돈을 낸 롯테는 총을 집어들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은 큰 전투를 준비하는 카우보이의 그것과 닮았다. "우와, 롯테 총도 쓸 수 있어?" 앗코가 물었으나 롯테는 눈 감고 손 모아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앗코가 자세히 귀 기울여보자 "아서, 제발 내게 힘을 보태줘……!" 앗코는 멈칫하고는 "아, 응. 못 쏘는구나. 미안."하고 물러섰다.

짧게나마 최애에게 기도를 올린 롯테는 나이트폴에서 봤던 묘사대로 총을 쥐었다.  손으로 총체를 감아쥐듯이 어깨에 꽉 대고……. 탕! 첫 발부터 보기 좋게 빗나가고 롯테는 말 없이 다음 코르크를 끼어넣었다. 너무나 엄숙한 모습에 그 누구도 말 걸기 어려웠다. 탕, 탕, 탕, 탕, 탕, 탕! 7발을 쏘았지만 겨우 스치거나 맞춰도 넘어가지 않았다. 롯테는 울먹이며 마지막 탄환을 쥐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틀렸어……."

"롯테."

다이애나가 말을 걸자 롯테가 고개를 들었다.

"다이애나?"

"괜찮다면 제가 해봐도 될까요?"

다이애나는 롯테가 살그머니 쥐고 있는 손을 펴게 만들어서, 코르크를 잡아들었다. 다이애나는 롯테가 했던 것처럼 코르크를 총구에 박아넣고 자세를 취했다. 롯테의 자세는 기세와 묘한 중압감이 있어 그럴듯해보였지만, 지금 다이애나와 비교하면 엉성해보일 지경이었다. 다이애나는 꼭 교본책의 사진처럼 완벽하게 사격자세를 취해 천천히 카운터에 길게 상체를 내려놓았다. 탕! 중심보다 조금 아래를 노린 코르크 탄환은 큰 쿠션의 무게중심을 잃게 만들었다. 갸우뚱하던 쿠션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의 시선이 곤두박칠쳤다. "다이애나!" 롯테가 다이애나의 손을 꼭 잡았다. "진짜 내 은인이야!"


롯테는 방긋방긋 웃으며 쿠션을 안아들었다. 앗코는 롯테와 수시가 마츠리를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라고 계속 생각했다. 내심 자신의 친구들이 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싫어하게 될까봐 꽤 긴장하고 있던 것 같았다. 

아츠코!!”

한 일본인 여자아이가 크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앗코에게 안겼다. 그 친구처럼 보이는 아이도 체력이 나쁜듯 슬금슬금 뛰어와 잠깐 숨을 고르더니 앗코를 보고 꺅꺅거렸다. 수시, 롯테, 다이애나 이 셋은 뭔가 목에 걸린듯 기분이 이상했다. 셋은 첫 만남에서 앗코가 자신을 카가리 아츠코라고 소개했던 것과 이따금 기재하는 문서 같은 것에 아츠코라는 이름을 쓰는 앗코를 떠올렸다.

긴장한 것도 풀린 탓인지, 앗코도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아츠코'라는 이름에 한껏 들떠버렸다. 앗코는 저도 모르게 마녀 친구들이 모를 언어로 재잘재잘 떠들었다. 일본을 떠나기 전처럼.

그래, 저쪽에서 보-이프렌드는 사귀었고?”

뭐야뭐야. 말투가 왜 그래.”

친구는 일부러 영국이라는 나라를 의식이라도 한 듯이 잔뜩 혀를 굴리며 보이프렌드라고 했다. 알 수 없는 일본어에 멍하니 있던 세 사람도 그 단어 하나만은 귓속에 콕 박혀들었다. 셋은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귀를 기울이며 대화의 맥락을 짚어나갔다.

여자만 있는 마녀학교인데 그런 게 어딨어.”

그래도 멋진 남자는 어디든 있는 법이잖아?”

아 뭐…… 남자…….”

아츠코에 뇌리에 앤드류가 스쳤다. 남자라는 범주에서는, 그리고 친구라는 범주에서는 그런 녀석도 있긴 하지. 잘난체가 심하긴 하지만.

뭐야뭐야. 있구나! 뭔가 있어!”

없어~ 있긴 뭐가 있어~”

그래도 그 반응은!”

순간 분명 버틸만한 더위인데 이상하게 덥다고 앗코는 생각했다. 뭔가 이상야릇하게 더우면서도 따끔따끔한 느낌. 앗코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3명 외국인 친구가 자신을, 아니 확실히는 자신의 일본 친구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꼭 동화책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마녀의 모습 같았다.

, 저어…… 아츠코쨩 친구들이야?”

조금 체력이 약한 친구가 잔뜩 겁에 질려 물었다.

, 으응. 그런데…….”

이미 질문을 한 친구는 무서운 듯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활달한 친구는 당황한듯 짧은 영어로 하우 아 유?”라고 물어도 셋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둘은 도망쳐버렸다.

저기, 다들…… 왜 화났…….”

화나지 않았어.” 화나지 않았는데?” 화나지 않았어요.”

거의 비슷하게 쏟아지는 대답에 앗코는 이상한 기백에 눌리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진정한 마녀의 힘인 건가?’ 더위와는 다른 비질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쏟아져나가기 시작했다. "불꽃놀이 시작한대!" 다들 하늘이 잘 보이는 찾아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웅성웅성하는 인파와 함께 앗코와 셋도 축제장 바깥 쪽으로 밀려나왔다정신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겨우 공터에서 만나자 여름 밤바람이 훅 얼굴을 끼얹듯 불어왔다.

축축하고 끈덕진, 앗코를 닮은 기후. 다이애나는 문득 자신이 내뱉은 그 어귀를 되새기었다

곧 사람들이 하늘에 집중하든 말든, 불꽃은 피어올랐다. 붉고 노랗고 파랗고…… 어둠을 헤치는 빛. 빛깔. 마법이 아닌 과학 영역의 빛이었다. 마법으로 화려한 것에 이골이 났을 법도 한 다이애나와 롯테도 그 광경을 환하게 쳐다보았다.

롯테가 바라보는 앗코의 눈에는 색색깔의 폭죽이 자기 순서도 모른채 어지러이 한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폭죽! , 우리나라에서는 불꽃이라고 하는데 말야…….” 앗코가 고개를 돌려 롯테를 정면에서 보아도 왼쪽 눈동자에 얼추 비치는 그 빛깔이 계속 남아있었다.

수시는 시선을 멀리하여 하늘에 터져올라가는 소리들을 관찰했다. 폭발음과 그 속에서 사금처럼 반짝이는 여자애들의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 수시는 더 깊은 어둠으로 눈을 감았다. 굽은 등뒤로 어린 자신이 숨어있는 게 느껴졌다.

등뒤로 붙어있는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기분 나쁜 감촉, 눈을 감아도 엷게 느껴지는 마츠리의 더러운 붉은 호롱불빛, 그리고 목소리, 선명한 어린 목소리. “역시 앗코는 남 휘두르는 데엔 천재라니까.” 어린 목소리가 키득키득 웃었다. 수시가 눈을 뜨자 어둠이 목을 죄듯 턱끝까지 차있었다. 불꽃이라는 외국어는 참 맘에 안 드는 어감이었다. 마츠리의 붉은빛이 멀어졌고 폭력적인 폭죽도 그쳐있다. 수시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수시?”

앗코가 말을 걸자 수시는 평소같은 제스쳐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아니 그 땀이 엄청나서.”

수시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매만지자 땀이 흥건했다. 머리 끝까지 더운 기가 새어나오지 못하고 계속 맴도는 것 같았다.

퓨루루루하는 특유의 높은 샛소리 이후에 마지막 폭죽이 터졌다. 불꽃火花이라는 말처럼 앗코의 머리 위로 꽃이 튀어올랐다. 수시는 별말 없이 앗코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어라? ? ?”

가만 있어.”

손끝부터 몸이 다시 싸하게 식어갔다. 어린 목소리는 묘함 발음으로 앗코앗코앗코 노래를 부르듯 괴상한 음정을 붙여 멀어져갔다. 수시는 묵묵히 어린 어둠을 길들이며 그것이 순해졌을 때 손을 내렸다. 앗코는 물론이고 다이애나와 롯테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수시는 팔을 포함에 아래로 길게 온몸을 늘어뜨리곤 이제 가자며 셋보다 먼저 어둠을 가로질러 길을 찾아갔다. 셋은 잠시 굳어 수시가 서있던 자리의 새카맣게 탄 자국을 들여다보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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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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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호무 조율 19금

소설 2015. 3. 31. 00:10

  마도카가 말을, 호무라의 영문 모를 말을 이으려 애쓴다. 그, 그러니까……. 타국의 언어 같기만한. 마도카의 두 어깨를 붙잡은 호무라의 가는 손. 턱 살짝 얹혀진 손인데도 바이스로 옥죄는 듯하다. 심리적 압박과 불안에 의한 공포증. 호무라가 마도카 몸에 상처 남을 짓을 할 리 없다. 고개 숙인 호무라. 어린 아이, 어머니 닮은 남을 붙잡은 듯한 간절함.  마도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나랑 자줘, 마도카."

  마도카에게 닿지않는 공허한 말. 마도카 등 뒤로 풀어지는 실끈. 호무라는 그 실타래를 쫓는다. 호무라는 쫓다 길을 센다.

  화장실. 기묘한 냄새. 락스향이 나는. 바다같으나 화학적이고, 현대적이며, 이상하게도 쓸쓸하다. 비어있는 4칸의 화장실. 화장실은 개인적은 공간이다. 화장실의 문이 잠기면 세상과 단절된다. 호무라는 세상에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치마를.

  "마도카."

  혼이 나간 듯 부른다. 호무라, 그녀, 길게 늘어진 검은 암말을 내린다. 탐욕에 젖어 번들거리는 시커멓고 긴 스타킹. 아아아, 남은 혼마저 빠져나가는 소리. 푹 젖은 팬티. 종아리에 걸쳐진 검은 암말. 그곳에 남은 건 욕망에 미친 한 여성. 마도카, 마도카, 아아, 마도카.

  중학교 3층, 2학년 교실 한 가운데 유배지처럼 박혀있는 바다향 나는 화장실. 어울리지 않는 성숙된 여자의 신음, 배덕음. 

  호무라는 순간 숨을 홉 들이마쉬고 밀어넣는다. 두가지가 쑥 속으로 들어간다. 호무라는 바닷물과, 내음, 태초의 온기를 몸 속에 받아들인다.

  꿈틀거리는 손가락. 으읍, 하며 무언가 말하려 움직이는 혀. 호무라는 혀를 송곳니로 콱 문다. 살짝 비릿한 침이 고인다. 달기만한 침. 꿀꺽 삼키자, 이전 몸을 나누었던 사랑의 맛이 난다. 미끈한 입 속. 흘러내리는 침을 되삼키면 몇 배의 침이 되살아난다. 

  혼자서 하는 키스는 너무나 서글프다.

  뱀같이 속살을 기어다니던 오른손을 훅 끄집어낸다. 축축하다기보다 끈끈하다. 호무라는 딱 붙어있던 검지와 중지를 좌우로 펼친다. 그 사이로 유백의 막이 늘끈하다. 브이자 사이로 늘어진 거미줄. 호무라는 몇 번이고 두 손가락을 붙였다 떨어트렸다, 숨을 뱉는다. 폐 속에 잤던 바닷물이 와르르 올라온다. 

  호무라, 운다. 그 수분이 눈물샘을 타고, 콧속을 자극하고, 말캉한 혀 사이로 침이 뚝뚝 떨어진다. 헉헉이는 몸. 만족을 모르는 쾌감이 무언가를 더 요구한다.

  끈끈한 눈물이 묻은 손으로 호무라가 학교 와이셔츠 단추를 끌른다. 검은 브래지어. 오늘을 위해 준비한 소녀 마음. 소녀는 찢어버릴 듯 가슴을 덮은 속옷을 벗는다. 드러나는 가슴. 봉긋 솟아오른 젖무덤은 그녀가 소녀만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 중 하나. 벌써 떨어져나갈 듯 달아오른 젖꼭지. 살짝 손대는 것만으로도 움찔, 크게 떨고 만다.

  두려움에 울던 소녀는 사라지고, 다시 욕망에 미친 여자만 남았다. 여자는 탐욕에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스스로를 위로한다. 으으, 하아. 달뜬 눈치다. 끈끈했던 오른손을 다시 다리 사이로 넣는다. 차다. 차진 손이 들어가는 길이 이상하게 뻑뻑하다. 읏, 하는 짧은 고통 새 손가락은 보이지 않는다. 호무라, 고통과 쾌감에 울먹인다. 단순 고통 탓만은 아닐 것이다.

  "마도…… 카."

  찔걱이는 소리가 너무 크고 적나라해서 무서울 정도다. 그 소리는 이 작은 화장실을 가득 메운다. 지지 않으려는 듯 마도카를 부르는 호무라의 목소리도 높아진다. 마도카, 마도카, 마도카. 마도카!

  짧은 스파크. 호무라는 수십 번의 경험에 이게 절정이란 것을 안다. 혼자 맞는 절정도, 그녀와 살맞댄 절정도, 다다른 후에는 너무 서글프다. 부끄럽다. 아까까지 마도카, 마도카 울부짖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

  "마도카. 보고싶어. 사랑해."

  호무라는 이제 이런 방식 외엔 사랑할 줄 모른다.

   

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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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마도호무

소설 2015. 3. 30. 23:31

C님 리퀘 : 지쳐서 흐물거리는 호무라 위로해주면서 고생햇다고 토톹톹톹 보듬어주는 훈훈한 마도호무죠'ㅂ'



  봄이라곤 하나 아직 춥다. 손잡이에 남은 겨울이 정전기처럼 올라온다. 호무라는 너무 차가워서 저도 모르게 손을 땐다. 이 문만 넘음 마도카가, 오매불망 자신만 기다리는 아가씨가 있을 터. 호무라는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한다.

  반짝이는 핸드폰 불빛. 이틀 전 온 문자가 비춰진다. '호무라쨩 어디서 자고 오는 거야?' 호무라는 답하지 못했다. 그 위로 3이 찍힌 물음표가 보인다. 호무라는 제갈량이 아니다. 용서받을 수 있을 턱이 없다. 

  "다녀왔습니다."

  "호무라쨩?"

  마도카가 거실에서 걸어나온다. 잠을 못잤는지 해쓱하다. 집 안은 따뜻하다 못해 덥다. 호무라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외투를 벗는다. 마도카가 건네 받는다. 사실 호무라도 마도카 못지 않게 수척하다. 받아든 외투는 도시 먼지와 추위에 찌들어 있다. 마도카는 왠지 모를 연민감에 호무라를 걱정스레 본다. 호무라는 그 눈빛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나, 너무 늦었지."

  호무라는 거실로 들어선다. 따뜻한 보일러기운이 훅 감싸돈다. 옆에는 자신의 두터운 외투를 접어들고 있는 마도카가 있다. 눈물이 핑 돈다. 호무라는 쇼파에 몸을 기대기보다 제 사람한테 달려든다. 가볍지만은 않은 호무라, 마도카는 잠깐 비틀 균형을 잃는다. 피곤한 것은 서로 다를 바 없다. 마도카는 화가 날만도 하건만, 뭐라 할 새도 없이 호무라가 운다. 살짝 눈가를 건들이던 울분은 얼굴을 감싸, 몸을 지배한다.

  "무슨 일 있었어?"

  호무라는 고개를 흔든다.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런 일은 없었는데……. 흐릿한 말 끝에 전하지 못하는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더 묻지 않기로 한다. 

  호무라의 머리카락은 외투같다. 바깥 이물질에 노출되어 파삭파삭하다. 마도카는 손가락으로 슥슥, 상하지 않도록 쓸어내려준다. 겨우 이틀 사라진 새에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이 우습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제 앞가림도 못하고 말야.

  "호무라쨩 멋대로 외박은 안돼. 걱정하잖아."

  "미안."

  물기서린 목소리. 마도카는 참지 못하고 품 속에 들어온 호무라를 꼭 껴안는다. 머리는 푸석하지만 어디서 씻고온건지 낯선 비누향이 난다. 마도카가 아는 호무라의 냄새가 아니다. 냄새가 바뀐다고 호무라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그녀가 바람을 필 리가. 그러나 마도카는 탐탁치 않다.

  "역시 외박은 안돼."

  "죄송합니다……."


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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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노조] 지구멸망

소설 2015. 2. 24. 01:17


커플_왼쪽에게_총이_있고_5분_내로_오른쪽을_죽여야_지구의_멸망을_막을_수_있다면_왼쪽은



  "5분인기라."

  노조미가 손대자, 빨간 탁상 시계의 불이 탁 켜진다. 5:00에 점멸했던 불은 4:59, 4:58을 지난다. 노조미는 여느 때와 같다. 노조미니까. 뮤즈의 정신적 지주인 노조미니까. 그녀가 이성을 잃고 운다거나, 화를 낸다는 것은 붕괴다.

  그런 노조미가 총을 쥐고 있다. 그것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쿡 들이박는다.

  에리는 멍하다. 노조미, 그녀, 무얼 하는가. 푸석 주저 앉은 에리, 의연하게 서 있는 노조미. 안돼. 에리의 바람소리. 안돼. 에리의 바람. 죽으면 안돼. 순간 노조미, 방아쇠를 쥐어짠다. 철컥.

  에리의 동공이 더할 수 없게 커진다. 푸르던 눈알 속, 어둠을 그득 담고서야 그것은 잠긴다. 철컥, 철컥. 몇 번의 차가운 쇳소리.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니. 이 무신 차별이가. 그체?"

  평생 신을 믿어본 노조미. 오늘만은 그 존재를 원망해본다. 노조미는 총을 내린다. 

  "벌써 1분이나 지난기라."

  빨간 불이 3:47을 막 지났다. 에리는 시계를 본다. 시계가 갉아먹는 시간. 이미 다 포기해 힘이 없다. 땅을 두드리며 발광할 힘조차 남지 않다. 

  "에리치."

  "에?"

  말라비틀어진 에리의 목소리. 여느 때와 같은 노조미와 대조되어 더욱 비통하다. 에리는 이 일의 종막을 어찌 끝내야할지 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땅을 두드리며, 두드린 땅을 뛰어다니며, 악악 소리쳐가며 저항한 것.

  에리는 여전히 주저 앉았고, 노조미는 서있다. 우위에 선 노조미, 그녀 에리에게 총을 겨냥한다. 에리와 노조미의 거리는 세엇걸음. 평범한 고등학생인 노조미란들 못 맞출 거리가 아니다. 에리의 동공은 커지지 않는다. 다만 동공같은 총구의 구멍을, 깊디 깊은 어둠을 본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철컥. 또 불발.

  시계는 2:26. 헛된 시간이다. 노조미는 쇳덩이를, 주저앉은 에리에게 바닥으로 쓱 쓸려보내준다. 그 차가운 물체가 에리의 다리에 닿는다. 에리, 그녀 순간 소름 돋는다. 난생처음 만지는 살인 도구에. 

  에리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쥔다. 입 속으로 총구를 쑤셔넣는다. 어둠 속에, 어둠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철컥. 또한 불발. 에리는 웁웁 거리며 방아쇠를 마구잡이로 당겨댄다. 고장이나 나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시계는 어느덧 1:04.

  에리는 입에서 총을 뺀다. 침으로 살짝 젖는다. 에리는 고개를 떨구고 운다. 총구도 떨궈져 지면에 숨을 죽인다. 노조미는 다만 무표정으로 본다. 시계는 어느덧 0:40을 지난다.

  "에리치."

  에리는 그 예쁜 호칭에 고개를 든다.

  느릿느릿하던 시계의 점멸이 빨라지는 듯 하다. 0:37.

  노조미는 웃고 있다. 교복 입은 그녀, 정말 소녀인가. 이런 상황에서 미소 짓는 그녀, 소녀인가. 형편없이 망가져 교복 니트 조끼 끝자락을 주먹쥐고 울먹이는 에리가 더 소녀 아닌가. 어째서 소녀가 소녀 아닌 사람을 죽여야하는가. 잔인치 않은가. 소녀가 살인 도구를 손에 쥘 필요 있는가.

  예외없이 시계는 0:26

  "노조미."

  에리와 노조미의 거리는 세엇걸음. 평범한 고등학생인 에리란들 못 맞출 거리가 아니다. 에리는 고개를 처들고.

  "노조미, 노조미, 노조미, 노조미."

  형편없이 망가진, 말라비틀어진 에리의 목소리. 나직하다.

  "에리치, 살아."  

  여느 때와 같고, 간결.

  철컥, 하는 소리도 묻는 총성과 동시에 시계는 0:13에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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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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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무라 짱은 장미 받아본 적 있어?"

  카나메 씨는 나는 없어, 라고 덧붙였다. 에히히하고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게 섭섭한 투는 아니었다. 장미는 좋아하지만 한번도 받아본 적은 없어, 라고 말하는 투가.

  장미는 향이 짙다. 굳이 장미가 아니더라도 향이 있는 것들은 안 되었다. 꽃의 향이란 벌레를 꼬기 위한 것이다. 그 유혹의 자극이 환자한테 좋을 리 만무했다. 나를 포함한 주위의 사람들은 미약한 자극에도 마녀에게 넘어가 잡혀먹힐 약한 이들이었다. 이따끔 문병자가 꽃바구니라도 사온들, 창밖에서 바라보기만 한 게 몇 번이던가. 스산한 병원 복도에서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는 꽃을 그저 바라만 보았던 걸 받아봤다고 말해도 되는건가. 짧은 고민 끝에 말한다. 저도 없었어요. 카나메 씨가 의외라는 듯 헤에, 대화 앞머리에 바람을 넣는다. 꽃은 병문안 선물로 잘 해가니까. 괜히 찔려서 흠칫거린다.

  갑자기 웬 장미 얘기? 편의점 앞에는 붉은 장미들이 예쁘장하게 포장 돼 진열되어있다. 꽃보다도 화려한 포장지에 눈이 휘황찬란하다.'당신의 사랑을 전하세요♥' 광고문구가 퍽 직설적인만큼 크고 화려하다. 사랑과 하트는 새빨갛게 물들여서 강조해놨다. 누가봐도 세상 모르는 젊은 애들을 노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가격이 꽤 높다. 꽃바구니에 붉은 장미 대여섯개 푹푹 박아넣기만 했는데 8천원이라니. 심지어 나름 안개꽃이라고 풍성하게 보이려 대충 뿌려둔 덩쿨은 조화다. 저런 걸 팔다니, 양심이 있는 건지 어쩐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비싸다는 감만큼은 느껴졌다. 멍하니 광고문구에 시선을 좇아가니 Rose day라는 문구에 도달한다. 아, 내일이로즈 데이였다. 장미꽃을 선물하는 날. 그래서 장미 얘기가 나온 거였구나.

  아무리 봐도 붉은 장미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편의점 주위를 총총 둘러보았다. 온통 붉은 장미뿐이다. 카나메 씨와 붉은 장미를 번갈아 쳐다본다. 잎이 어긋나서 중심점을 겹겹이 감싸돌고 있는 붉은 장미. 귀부인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정열적인 여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고풍스럽지만 저 소용돌이 속에 격렬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느낌이다. 둥글둥글한 눈매와 턱선, 빛이 모여있는 분홍빛 눈, 자그마한 동물같은 카나메 씨.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장미꽃의 느낌상의 이질감도 있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호무라 짱? 카나메 씨의 호명에 놀라 정신을 차린다. 나도 모르게 카나메 씨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워서 홱 고개를 돌린다. 이제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볼지.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며 걸었다.

  "내일 보자."

  "아. 아, 네! 내일 봬요." 

  땅만 보고 걸었더니 벌써 헤어질 때였다. 부끄러운 마음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다. 카나메 씨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울적해져 혼자 가는 길이 유난히 멀다. 터덜터덜 상가건물이 늘어선 길을 걷는 도중,

  "이런 데에 꽃집이 있었나?"

  반 호기심으로 문을 드밀고 들어서자 딸랑, 하는 맑은 종소리가 점내를 울린다. 어서오세요. 젊은 남자가 꽃 사이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다. 왠지 카나메 씨의 아버님이 떠오르는 청년이었다. 내일이 로즈데이여서인가, 보기 좋은 곳에 장미꽃이 색색별로 진열되어 있다. 내가 장미에 눈길을 주자, 눈치 빠른 그가 말을 건다.

  "장미 찾으세요? 로즈데이라 괜찮은 게 많이 들어왔답니다."

  한 장미, 한 장미. 찬찬히 보여주며 설명한다. 내가 소녀아이인걸 의식했는지 재배방법이나 값에 대한 얘기는 일절 없고, 로맨틱한 이야기만. 그러다 문득 분홍 장미에 눈이 꽂힌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 같은 색. 단순, 맹세…….

  "분홍 장미는 꽃말이 많지만, 일흔두송이는 행복한 사랑이라는 꽃말이 있답니다."

  로맨틱한 그의 설명에 부끄러워졌다. 나는 카나메 씨한테 그런 의미로 드리는 게 아닌데. 그냥, 로즈데이니까.

  "여섯 송이 주시겠어요?"

  그는 싱긋 웃으며, 기술 좋게 빽빽이 꽂힌 장미 속에서 여섯송이만 쏙쏙 골라 빼낸다. 그리고 곧바로 꽃을 싸준다. 투명한 비닐에 분홍 장미가 잘 보이게끔, 그러나 상하지 않게끔 소중히 포장해준다. 그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꽃을 다루는 손에 사랑이 그득했다. 이 집은 쿠폰제라며, 열번 이용하면 꽃 다섯송이를 서비스한다며 그는 꽃다발과 같이 넉살좋게 쿠폰도 하나 건내준다. 꽃집을 열번이나 이용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련지? 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었다.





  "분홍?"

  "카나메 씨한테는 분홍 장미가 어울리니까……."

  일부러 샀어요, 라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단순히 편의점에서 파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미친 모양이다. 어디서 샀어? 비싸지 않았어?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질문을 퍼붓던 카나메 씨는 눈이 도는 내 모습에 그냥 싱긋 웃곤, 고마워 했다. 확하고 얼굴에 뜨건 김을 퍼붓는 듯 했다.

  "다, 단순히 친애로 드리는 거예요. 로즈데이니까요."

  "응. 그렇구나. 고마워."

  나는 거짓말을 할 때면 말이 길어졌다. 그녀는 다 안다는 듯 씨익 웃었다. 뭔가 지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자꾸만 말이 길어졌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정말 카나메 씨 혼자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리 무모한 거예요?"

  "단순해. 나는 엄마, 아빠, 타츠야, 사야카 짱이랑 히토미 짱, 마미 선배, 쿄코 짱, 그리고 호무라 짱, 너를 지키고 싶으니까."

  "가면 죽을거야. 자살이라구!"

  울며불며 막는 나를, 너는 가벼이 안아준다. 기쁜데,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하는 것 같아서. 네 옷을 꽉 쥔다. 내 등을 토닥여주는 느낌이 좋다.

  

  "이 장미 '단순'이 꽃말이지? 단순하게, 잡념을 비우니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알았어. 꽃 선물 고마워."

  고개를 들어 너를 본다. 너는 웃고 있었다.

  "정말 기뻐. 호무라 짱을 지킬 수 있어서."

  "가지마."

  "그럼 이별이네. 건강히 지내."

  "가지마!"

  왜 '또 보자'가 아닌거야? 왜, 이별이라고 하는거야? 처음 듣는 네 작별 인사에 정신이 어떻게 될 것만 같다.

  버클러의 모래시계가 찰칵하고 뒤집어진다. 나의 의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더이상 '이 세계의 카나메 씨'를 구할 수 없다며 단념할 때, 그 무의식이 이 시간을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뿌예지는 발푸르기스의 밤을 향해 뛰어날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하얀 빛에 먹혀간다.

  하얀 빛이 강해져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쯔음, 나는 하얀 천장 아래, 하얀 침대 시트 속, 하얀 병동에서 하얗게 질린 채 일어난다. 오른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오전 10시 쯤. 그대로 시선이 내려와 옆 테이블의 탁상달력을 본다. 퇴원날이라고 꽃무늬 쳐둔 날의 전전날까지 가위표가 쳐있다. 오른손을 들어올린다. 깔끔한 실버링, 약지 손톱의 보랏빛 다이아몬드 표식. 시계와 달력을 보고 현실을 깨닫고, 소울 젬을 보고 소원을 깨운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여기서 마법소녀인 아케미 호무라가 될 수 있다. 나의 한심함에, 또 그녀를 희생했다는 한심함에 만사 제쳐놓고 울음부터 터트린다. 꿈이 아니다. 꿈이라면 좋을련만……. 아니 이미 꿈이긴 하다. 그건 이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다음엔 반드시 카나메 씨. 아니, 마도카 널……."


=


  "마법소녀는 마녀가 되는거야?"

  

  네가 진실을 알아차리는 때가 있다. 나는 조심히 너를 어른다. 맞아, 마법소녀는 마녀가 돼. 뭐가 널 그리도 괴롭게 하는 걸까. 역시 마법소녀라는 굴레에서 너를 빼낼 수 없는 걸까.

  마음이 약해질 때, 나는 어김없이 꽃집을 들른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한결같은 그 가게. 내 돈으로 살 수 있는 최대한의 장미, 여섯송이. 내가 매번 꽃을 사면 그 꽃들은 100% 똑같은 꽃일까. 겉보기엔 똑같지만 나로서는 알 길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그게 전과 똑같은 장미라고. 변하지 않았다고.

  "저기, 손님. 혹시 뵌 적 있나요?"

  오늘 주인의 대사가 다르다. 질문에 놀라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어설픈 기억에 퍽 혼란스러워하는 태다. 나는 퍼득 정신을 차리곤 없다고, 처음 본다고 답한다.  오랫동안 병원에 있어서 꽃냄새 맡을 새도 없었다고 덧붙인다.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 왔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데 말이 길어진다.

  그는 갸웃하면서도 말없이 꽃을 싸준다. 투명한 비닐에 분홍 장미가 잘 보이게끔, 그러나 상하지 않게끔 소중히 포장해준다. 역시 그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받아든 장미다발은 여섯송이가 아니었다. 다섯송이 많은 열한송이. 내가 묻기도 전에 그가 말한다. 덤으로 다섯송이 넣었어요. 이 집은 쿠폰제라서, 열 번을 이용해야 꽃 다섯송이를 받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쳐다보니 그, 변명하듯 손님 낯이 익다고. 인연인 것 같다고. 수줍게 웃는다. 그 비싼 값을 그저 낯이 익다며 그냥 주다니?  작업멘트였으면 멋없어도 정말 없는 거였다. 그는 또 오라며 도장 하나 찍힌 쿠폰을 건내준다. 지갑 속을 보니, 도장 하나 찍힌 쿠폰이 아홉장 들어 있어, 이번이 열장째였다. 그러니, 거짓이 아니었으니 풍성하기까지 한 그 열한송이 장미다발을 군말없이 받아들었다.

  "분홍 장미는 꽃말이 많지만, 일흔두송이는 행복한 사랑이라는 꽃말이 있답니다."

  로맨틱한 그의 설명.



  "마도카. 이 도시에 곧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무서운 마녀가 올거야."

  네가 알기 쉽도록 차근차근 말해준다. 몇번째 설명인지 넌 모를테다. 얼추 설명을 다 들은 너는 힘없이 빙글 웃었다.

  "그런 엄청난 마녀면 호무라 짱 혼자서는 힘들겠네."

  "아니, 나 혼자 충분해."

  쿄코한테 도움을 요청했던 것도 그녀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서였다며, 거짓을 고한다. 마미나 사야카 따위보다 내가 훨씬 강하다며, 거짓을 고한다. 말이 길어진다. 초조해진다. 아아, 나는 정말 거짓말을 못한다. 너에게 들킬까 무서워서 벌벌떨며 고한다. 너, 눈에서 몽글몽글 눈물방울을 터트린다. 울고싶은 건 나건만.

  "어째설까. 호무라 짱을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어."

  네 그런 상냥함이 나를 얼마나 나태하게 만들었는지, 오해시켰는지. 나는 맹세를 굳히고자, 너에게 그 열한송이의 장미를 바친다.

  "제발 내가 너를 지킬 수 있게 해줘. 이 맹세를 받아줘."

  너는 눈을 둥글게 뜨면서도, 그 맹세를 받아든다. 내가 이 꽃을 지키면 너는 살아남을 것이다. 여기까진 언제나와 같지만, 이 앞에서부터는 큰 기적이 필요했다. 그런데 기적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호무라 짱. 일흔한송이 째야."

  "일흔한송이?"

  "이제 장미 한송이면 단순한 친애도, 맹세도 아니게 돼."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걸까. 깜짝 놀라서, 뭔가 물을 생각도 못하고 가만 서있었다.

  "꽃 선물 고마워."

  너는 장미 다발을 들고 떠났다. 나는 그 감사를 언젠가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결국 발푸르기스의 밤을 뛰어넘지 못하고 너를 끌여들였다. 안된다고, 여기 네가 있어선 안된다고 그렇게 외치는데 너는 무시한다.

  너는 의연했다. 멋지기까지 한 네 뒷모습. 너의 눈동자가, 살짝 등돌려 슬쩍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본다. 제발 내게서 눈을 떼지 말아줘.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다른 것을 채우지 말아. 나의 간절한 소원은 소리 없이 무너지고, 너는 인큐베이터와 마주선다. 너의 입술이 움직여 말을, 소원을 만든다. 막고 싶다. 그 입을 틀어막고 싶다. 나는 이 광경을 언젠가 또 봤었다. 헌데 인큐베이터의 반응이 다르다. 표정이 있을 리 없는 그의 동공이 커진 것 같다.

  그렇게 너는 신이 되었다.





  마도카……. 멍하게 네 이름을 발음해본다. 카나메 마도카. 마도카. 손에 남은 리본이, 아스라이한 몸의 부유감이 현실감 없다.

  며칠을 그렇게 현실감 없이 보냈다. 모든 게 둥실둥실했다. 수업 내용은 값어치 없는 쪽잠 같았고 모든 인간관계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학생이 넘치는 학교, 카나메라는 성씨를 가진 3명. 왜 어디에도 마도카가 없는 걸까. 용기를 내어 너의 집에 갔다. 거리에서도, 학교에서도 너의 존재를 찾을 수 없어, 너의 근원을 찾아서. 이끌리듯 도착한 네 집 문패에서 볼 수 없는, 흔적도 없이 지워진 네 이름. 카나메 준코와 카나메 타츠야 사이의 공백을, 원래는 있어선 안되는 그 짧은 공백의 틈을 몇 번이나 매만지고서야 나는 네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카나메 마도카라는 사람은 이 집에 없었다, 이 거리에, 이 학교에 없었다.

  그날 늦게 집에 들어온 나는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잠들었다. 오랫동안 쐰 찬 밤바람에 열병을 앓았다. 위아래가 분간 안되는 몽롱함이었다. 멍하니 서있으니 발목이 서늘했다. 나는 발목까지 찰랑찰랑 넘치는 맑은 강을 건넜다. 구두랑 스타킹이 젖었지만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강가에는 언뜻 낯익은 꽃도, 이름 모를 들꽃도, 계절감 모르고 웬갖 꽃이 피어 있었는데 장미만은 없었다. 내 키에 두배가 넘는 커다란 해바라기가 나를 내려다보고, 내 엄지발톱만한 민들레가 인사하는 이곳인데 장미가 없다. 괜히 가슴이 미워져서 울먹이며 걷는데, 거짓말처럼 장미 화원이 나타났다. 조금 높은 강가 둔덕을 기어 올라와 그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엉겅퀴에 스타킹이 찢기고, 다리가 따끔거렸지만 상관 없었다. 

  붉은 장미, 노란 장미, 하얀 장미, 까만 장미. 장미향이 훅 끼쳐와 정신이 아득해졌다. 향은 유혹의 자극. 분홍 장미만 없었다. 색색의 장미가 나를 꺾으라며 손직했다. 손이 갔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 이건 안돼. 저 멀리서 마치 빛을 머금은 듯한 장미가 제 몸을 뽐내고 있었다. 마지막 송이. 일흔두번째 분홍장미. 단지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져서 다리 힘이 풀렸다. 너는 어딨을까. 

  딸랑, 맑은 종소리가 들렸다. 딸랑, 강 쪽이었다. 딸랑, 나를 부르고 있었다. 힘겹게 일어서 강으로 걸어간다. 점점 상류로 올라설수록 강의 깊이와 물살이 가파라졌다. 그 깊고 빠른 강 넘어에 뒤돈 네가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네가 있었다. 뒤통수라 하나, 어찌 네 모습을 잊겠는가. 반가움에 앞뒤 안 가리고 강을 건너려 한 쪽 발을 드민 순간, 몸이 확 쏠렸다. 이대로 들어갔다간 저세상 행을 면치 못하리라고 경고하는 듯 했다. 다리도, 건너갈만한 구조물도 없었다. 네가 있건만, 바로 눈앞에 네가 있건만. 발만 동동 구를 수 밖에 없는건가. 마도카, 소리를 내도 물소리에 묻혀 닿지 못했다. 마도카, 아무리 소리쳐도 너에게 닿지 않았다.

  "호무라 짱. 오랜만이야."

  너의 조그마한 목소리는 물소리에 묻히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이 닿은걸까. 네가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보았다. 너의 눈을, 그 깨끗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내가 무너졌다. 너는 이윽고 완전히 몸을 돌렸다. 네 품속에는 일흔한송이의 장미가 한가득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무른 것도 있고, 피로 새빨갛게 물든 것도 있다. 분홍색 장미 모양 온전히 유지하는 게 채 열송이가 안됐다. 그 수만큼, 그 이상으로 너는 죽었다. 나는 땅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너를 다시 봐서 안도한건지, 얼싸안을 수 없는 불완전한 만남에 절망한건지, 그 장미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인건지.

  네가 빙글 웃었다. 흐릿한 시야에 미친 듯이 눈물을 닦아내고 널 보려했는데 눈물이 멎지 않는다. 너의 모습이 흐릿하다.

  "마지막 장미지? 그거. 무슨 의미야?"

  나는 장미 가시에 찔리는 줄도 모르고 그 줄기를 꼭 쥐고 있었다. 상처를 보자 조금 따끔거렸다. 마도카가 허탈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치는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울고 있던 내가 어처구니가 없나보다.

  고개를 들고 다시 너를 본다. 여신상에 꽃을 바치는 소녀처럼, 나는 무릎을 꿇고 너에게 그 한송이 꽃을 정중히 내민다. 그리고 속에서 계속 꾹 억눌렀던 그 말을, 꽃말을 빌려 말한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너는 말없이 웃는다. 대답해줘. 대답해줘, 마도카. 점점 새하얀 빛이 너를 먹어간다.




  하얀 빛이 강해져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쯔음, 나는 비적비적 일어난다. 결국 너는 답해주지 않았다. 거짓말은 못한다는 거야?

  시계를 확인하려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일순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돼. 테이블 위에 있는 저건. 나는 천천히 테이블까지 걸어갔다. 마치 그것이 도망칠까, 조심하듯이. 스럭하고 비닐 움직이는 소리가 내 손을 타고서야 나는 그 실체를 믿을 수 있었다.

  "병문안 선물로 장미는 안되는데. 마도카도 참."

  손 안에 있는 건 세보지 않아도 틀림없이 일흔두송이일 분홍 장미다발이었다.

  네 답은 이거구나. 행복한 사랑이구나. 나 정말 행복해, 마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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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무나카]

소설 2015. 2. 20. 20:50


  호무라가 가만 교실 뒷자리에 앉았다. 모두 하교하여 빈교실. 져가는 노을이 들어온다. 유리창, 유리벽 학교를 점령하는 노을. 호무라의 도수 높은 안경알도 점령 당한다. 모든 것이 주홍빛. 

  그 수상한 세계를, 호무라는 별 의지 없이 보고 있다. 

  "아케미?"

  드륵하는 문소리보다 먼저 누군가의 목소리. 들어온 것은 깔끔하게 머리를 넘겨 빗은 사내아이였다. 훤히 드러난 이마. 그 아래의 이목구비가 노을에 주홍빛으로 가물가물하다. 호무라, 그제서야 맨 앞자리에 가방과 하쿠란 상의가 걸쳐져 있음을 눈치챈다. 

  "아직도 안 돌아가고 뭐 하는 거야?"

  그는 자기 짐을 챙기며 묻는다. 좌측 창가에 바짝 붙어 앉은 호무라. 거긴 그녀의 석이 아니다. 그녀의 석은 그의 바로 옆자리. 그녀는 자기 석도 아닌 곳에서 턱을 괴고, 창을 내다보고있다. 사내 아이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답이 없기에, 그냥 교실을 나서려 한다.

  "나카자와 군." 

  그가 제 이름을 불려 깜짝 놀란다. 가물가물하던 이목구비가 자리를 잡는다. 사내 아이, 나카자와는 몸은 바깥을 향한 채 고개만 돌려 호무라를 본다. 호무라는 그를 보고 있지 않다.

  "당신이야말로 왜 여태껏 있는 거야?" 

  "어, 축구를 하다보니." 

  "다른 애들은?"

  "모두 갔지."

  "축구는 어디서 했는데?"

  "어디라니, 운동장……." 

  "넌 운동장에 없었어."

  호무라의 말은 무심하나, 노한 듯 하다. 호무라는 이제 그를 뚫어져라 본다. 심약해보이기만 했던 호무라의 이탈적 행동. 그러나 나카자와는 정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돌아왔으며 거짓말 할 이유도 없었다. 

  절로 차렷하는 두 발. 운동장의 흙먼지를 흘려씻기는 마른땀. 빳빳히 굳어 제 기능을 잃은 목근육. 가늘어지는 손힘. 하아, 하는 갸날픈 숨소리가 들려서야 그도 숨을 내뱉는다.

  "미안."

   호무라의 짧고 진중한 사과. 당신이 나쁜 게 아닌데. 미안, 미안. 그 뒤로도 호무라가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나카자와는 듣지 못한다. 

  놀란 그, 저도 모르게 한 소리 한다.

  "아케미, 오늘 좀 이상하네."

  호무라가 고개를 갸웃인다. 그 어벙한 행동이 그제야 평소 그녀 같다. 조금 안심한 그가 편히 말을 잇는다.

  "좀 쿨한 느낌이야. 평소에는 우왕좌왕했었는데."

  그녀, 혼 나간 것 같이 큰 동공으로 그를 보더니 피식 웃는다. 웃는 태가 예쁘장하다. 그가 '평소' 본 아케미 호무라의 귀엽고 고운 미소가 아니다. 순간 나카자와의 가슴 속이 뜨끔하다. 무언가 질 나쁜 죄라도 저지른 듯 하다.

  "그러게. 오늘 나는 나답지 못하네."

  호무라가 벌떡 일어나 나카자와에게 다가간다. 땋은 머리를 풀자, 긴 생머리가 확 흐트러진다. 촌스럽던 붉은 안경까지 벗자, 정말 견줄 데 없는 미소녀다.

  저벅, 저벅.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렌즈를 통한 것이 아닌, 맨으로 보는 호무라의 눈동자.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적보랏빛이 강렬하다. 신체는 전혀 접촉하고 있지 않지만 이미 넘어트러지기라도 한 듯. 그의 눈동자가 휘몰아친다. 두려움이다. 전부터 호감갖던 여리지만 나긋나긋한 동급생 아이의 자신을 뜯어 먹을 듯한 기세에 두려워진 것이다. 나카자와는 그녀의 손이 다가오자, 두 눈을 질끈 감는다.

  호무라는 그의 쓸어올라간 앞머리를 결에 맞춰 쓸어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꾹꾹. 어머니가 아들 매무새 만져주는 듯한. 나카자와가 실눈 뜨니 그녀, 평소처럼 웃는다. 상냥하게 웃는다.

  나카자와가 놀라 뒤로 물러서다, 문턱에 걸려 우당탕 넘어진다. 이크, 하며 우스꽝스럽게 자빠진 그를 지나쳐, 그녀는 말한다. 문단속 잘 하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냉한 그녀의 태도. 나카자와는 꿈결같아 멍하니 머리 푼 그녀 뒷모습만 본다. 저벅, 저벅. 단화가 복도에 내딛힐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머리. 

  나카자와는 거칠게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따뜻한 온기가 있어, 꾹꾹 눌러 올려준 온기가 있어. 도통 모를 지경이다. 제 아무리 꼬집어도 깨지 않는 묘한 꿈.

  "나답지 않네……."

  호무라가 중얼거린다. 교내 밖은 벌써 어둑어둑하다. 넓게 이어진 하늘. 하지만 이 하늘이 미타키하라 다음도 있을 지는 모를 일. 호무라는 하아,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그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 아마 그를 불러낸건 그녀 자신일 것이라며, 호무라는 마냥 세상 끝까지 이어져 있을 것 같은 넓은 하늘 아래서 엷게 태연한 미소 짓는다. 평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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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사야] 19금

소설 2015. 2. 17. 23:49

쿄사야











  "오늘은 꽤 춥지, 사야카. 금방 데워줄게."

  물론 사야카는 말이 없다.

  손 안 소울 젬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널 훑는다. 붉은 빛을 받은 몸이 번들번들하다. 실체없는 혀가 널 핥는 것 같아 역겹다. 그 혀가 침으로 너를 겁탈하는 듯 하여. 후에 너의 뽀송뽀송한 팔을 몇 번이고 주물고야 안도한다. 내 손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가만 누워있는 너, 답답해보이는 교복 앞섭을 푼다. 이러니까 영락없이 자는 꼴이다. 

  무방비한 너. 곱게 감은 눈, 흐트러진 옷무새, 머리칼, 살짝 벌려진 입. 시선은 아래로 내려간다. 또래 아이보다 좋은 발육의 몸. 가늘고 흰 손가락. 단정한 손톱. 왼손 중지손톱의 C자형 무늬. 교복치마 뒤로 뻗은 매끈한 다리. 까만 스타킹. 너의 몸을 정의하는 단어들이 외설적이다. 찌라시 성인 광고에서나 볼 법한. 자신의 표현력이 악스러워 울고 싶어진다. 너를 함부로 표한 내게 벌 내리리. 그러나 감출 수 없는 감정에 숨이 바짝 마른다. 벌 내리리, 벌 내리리. 중얼거린다한들.

  결국 오늘도 참지 못하고 네 위로 올라서 입을 맞춘다.

  네 입 속은 예상 외로 축축하다. 며칠간 물 한 방울 안 마셨는데도 긴장에 바짝 마른 나 따위보다. 네가 내 행동에 반응해줄 리 없는데 이렇게 입을 맞추고 있으면 꼭 네가 살아있는 것 같아서. 

  관계까진 아니었으나 키스를 나눠본 남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남자들이란 단순한 족속이라 영 귀찮게 굴면 혀 한번 굴려주는 걸로 충분했다. 기분 더럽고 근질근질해서 충동적인 감정이 든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살인적으로. 그렇지만 사야카, 너와 입을 맞추고 있으면 다른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검붉고, 사나운 기운. 아마 나와 키스를 나눈 사내들이 가졌었을.

  그 감정은 너와 입을 맞추면 맞출수록, 혀를 얽으면 얽을수록 커진다. 부력 있는 몸처럼 감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사야카아……."

  제 풀에 지쳐버려 네 목덜미에 폭 파고든다. 부드러운 품. 매일 아침 씻기고 있기 때문에 나쁜 냄새는 없다. 내가 쓰는 것과 같은 바디워시, 샴푸. 킁킁일 때 마다 내 향이 난다. 너에게서는 맑고 푸른 바다 향이 난다. 폐 속 가득 네가 들어온다. 너는 투명하디 투명하다. 코를 타고, 목구멍을 간지럽히다 폐에 자리잡는다. 내가 들이쉬었던 숨이 네 폐에도 들어가면 좋을련만. 나는 의도적으로 네 가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다만 거칠게 문지르고 물어뜯는다. 네 아랫도리에 손을 뻗어보면, 슬프게도 본능 탓에 젖어있다. 

  이 행위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은데. 본능적이지 않은데.

  야릇한 기분에 젖는다. 네가 반응해준다는 그 사실이 기쁘다. 잠시 한땀 식히려, 위에서 너를 내려다본다. 너의 볼을 빨갛게 익었고, 풀어젖혀진 가슴은 번들하다. 호텔 밖, 도시의 푸른빛이 우릴 내리쬔다. 너는 새초롬하게 입만 다물고 있다. 그게 더욱 흥분된다. 

  네 가슴에 간사한 혀를 움직인다. 네 젖꼭지는 작고 단단하다. 동전 옆면을 매만지는 느낌. 검지와 중지 사이에 넣고 굴리면 네 등이 들석이는 것 같다. 어설프게 핥는 것보다 손으로 만지는 게 낫다. 

  치마 후크를 푼다. 스타킹에 손댔다 그 매끈함에 말을 잃는다. 아아, 나는 변태였던가. 너를 옆으로 눕히고 다리를 매만진다. 스타킹에 감싸진 열다섯 몸의 부드러움. 

  나도 바지를 벗고 반나체로 너에게 다가선다. 네 앞에서 내 젖가슴을 드러낼 수 없다. 이상한 두려움. 당장이라도 곱게 감긴 그 눈이 확 뜨여 비웃을 것 같은 두려움. 불공평하다만은 겁만은 몸은 쉽사리 위까지 드러내지 못한다. 

 나만이 아니다, 너 역시 젖었다. 너와 몸을 맞추며 새삼 그 질척한 감촉에 놀란다. 네 애액으로 미끈한 검지. 네 헤벌레하게 열린 입 속을 그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애액에 비해 말간 침. 아랫니 안 쪽을 집요하게 문지르면 하아, 하는 안타까운 신음이 들린다. 

  나는 너의 그 조그마한 반응 하나하나에 흥분한다. 가끔 흔들리는 호흡이 다지만, 훌륭한 먹잇감.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던 아버지의 말씀. 죄스럽게도 딸인 나는 위에서, 그것도 여자 위에서 몸을 흔들며 사랑을 나누고 있다. 나는 죄인.

  그리고 결국은 고조의 달한다. 

  숨을 학학 내쉬며 네 품 속에 쓰러진다. 심장소리가 들린다. 팔딱, 팔딱, 팔딱. 꼭 금붕어 튀는 것 같다.    

  "사내새끼랑 자는 것보다 훨씬 낫지. 응?"

  물론 사야카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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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무라 쨩, 잠깐! 물에 초콜릿을 넣는 게 아니라 중탕하는 거야!"

  "중탕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퇴원하고 처음 발렌타인을 맞는다는 호무라 짱. 거짓말은 아닌지 모든 게 서툴기 그지 없다. 다행히 초콜릿을 바로 녹이진 않았지만 설마 물 속에 넣어버릴 줄이야. 겨우 형체가 남은 초콜릿 덩어리를 건져낸다.

  "중탕이라는 건 뜨거운 물에 녹이는 거지, 물이랑 섞는 게 아냐."

  나는 준비한 그릇에 초콜릿을 넣고, 물 속에 담근다.

  김으로 호무라 짱의 안경이 뿌얘진다. 호무라 짱은 눈을 빛내며 내가 초콜릿 녹이는 걸 본다. 안경이 저래선 잘 보이지도 않을텐데.

  녹아가는 초콜릿을 나무주걱으로 으깬다. 형체를 잃은 초콜릿은 끈적한 액체가 된다. 장갑을 끼고 초콜릿을 꺼낸다. 그때까지 내 손짓 하나하나에 정신 팔린 호무라 짱의 시선이 조금 무섭다.

  "대단해요. 카나메 양!"

  "그럼 다음은 호무라 짱이 다 해."

  "그, 그런 게 어딨어요."

  호무라 짱이 울먹인다. 귀엽다. 그녀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조금 심술궂어진다.

  "쉬워. 이 짤에 초코를 넣고 틀에 맞춰 짜면 돼."

  호무라 짱은 의기투합해서 조심조심 짤에 잘 녹은 초콜렛을 넣는다. 그냥 긁어 넣기만 하면 되는데. 그릇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힘들어?"

  나는 뒤에 서서 그릇 손잡이를 같이 잡아준다. 호무라 짱은 크게 놀라 들고 있던 짤주머니를 놓친다. 초콜릿이 질퍽하게 바닥에, 그녀의 손바닥에 튄다.

  "있잖아. 나 물어볼게 있었는데."

  초콜릿이 튄 그녀의 손의 목을 삭 잡아들며 귓가에 속삭인다. 이 초콜릿 만들어서 누구 줄 생각이었어? 호무라 짱은 가늘게 카나메 양. 이라고 우는 듯 하다.

  "울지 말고 대답해. 누구?"

  "카나메 양이요."

  나는 그녀의 손을 할짝였다. 이제 먹어버렸으니까 만들 필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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