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무나카]

소설 2015. 2. 20. 20:50


  호무라가 가만 교실 뒷자리에 앉았다. 모두 하교하여 빈교실. 져가는 노을이 들어온다. 유리창, 유리벽 학교를 점령하는 노을. 호무라의 도수 높은 안경알도 점령 당한다. 모든 것이 주홍빛. 

  그 수상한 세계를, 호무라는 별 의지 없이 보고 있다. 

  "아케미?"

  드륵하는 문소리보다 먼저 누군가의 목소리. 들어온 것은 깔끔하게 머리를 넘겨 빗은 사내아이였다. 훤히 드러난 이마. 그 아래의 이목구비가 노을에 주홍빛으로 가물가물하다. 호무라, 그제서야 맨 앞자리에 가방과 하쿠란 상의가 걸쳐져 있음을 눈치챈다. 

  "아직도 안 돌아가고 뭐 하는 거야?"

  그는 자기 짐을 챙기며 묻는다. 좌측 창가에 바짝 붙어 앉은 호무라. 거긴 그녀의 석이 아니다. 그녀의 석은 그의 바로 옆자리. 그녀는 자기 석도 아닌 곳에서 턱을 괴고, 창을 내다보고있다. 사내 아이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답이 없기에, 그냥 교실을 나서려 한다.

  "나카자와 군." 

  그가 제 이름을 불려 깜짝 놀란다. 가물가물하던 이목구비가 자리를 잡는다. 사내 아이, 나카자와는 몸은 바깥을 향한 채 고개만 돌려 호무라를 본다. 호무라는 그를 보고 있지 않다.

  "당신이야말로 왜 여태껏 있는 거야?" 

  "어, 축구를 하다보니." 

  "다른 애들은?"

  "모두 갔지."

  "축구는 어디서 했는데?"

  "어디라니, 운동장……." 

  "넌 운동장에 없었어."

  호무라의 말은 무심하나, 노한 듯 하다. 호무라는 이제 그를 뚫어져라 본다. 심약해보이기만 했던 호무라의 이탈적 행동. 그러나 나카자와는 정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돌아왔으며 거짓말 할 이유도 없었다. 

  절로 차렷하는 두 발. 운동장의 흙먼지를 흘려씻기는 마른땀. 빳빳히 굳어 제 기능을 잃은 목근육. 가늘어지는 손힘. 하아, 하는 갸날픈 숨소리가 들려서야 그도 숨을 내뱉는다.

  "미안."

   호무라의 짧고 진중한 사과. 당신이 나쁜 게 아닌데. 미안, 미안. 그 뒤로도 호무라가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나카자와는 듣지 못한다. 

  놀란 그, 저도 모르게 한 소리 한다.

  "아케미, 오늘 좀 이상하네."

  호무라가 고개를 갸웃인다. 그 어벙한 행동이 그제야 평소 그녀 같다. 조금 안심한 그가 편히 말을 잇는다.

  "좀 쿨한 느낌이야. 평소에는 우왕좌왕했었는데."

  그녀, 혼 나간 것 같이 큰 동공으로 그를 보더니 피식 웃는다. 웃는 태가 예쁘장하다. 그가 '평소' 본 아케미 호무라의 귀엽고 고운 미소가 아니다. 순간 나카자와의 가슴 속이 뜨끔하다. 무언가 질 나쁜 죄라도 저지른 듯 하다.

  "그러게. 오늘 나는 나답지 못하네."

  호무라가 벌떡 일어나 나카자와에게 다가간다. 땋은 머리를 풀자, 긴 생머리가 확 흐트러진다. 촌스럽던 붉은 안경까지 벗자, 정말 견줄 데 없는 미소녀다.

  저벅, 저벅.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렌즈를 통한 것이 아닌, 맨으로 보는 호무라의 눈동자.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적보랏빛이 강렬하다. 신체는 전혀 접촉하고 있지 않지만 이미 넘어트러지기라도 한 듯. 그의 눈동자가 휘몰아친다. 두려움이다. 전부터 호감갖던 여리지만 나긋나긋한 동급생 아이의 자신을 뜯어 먹을 듯한 기세에 두려워진 것이다. 나카자와는 그녀의 손이 다가오자, 두 눈을 질끈 감는다.

  호무라는 그의 쓸어올라간 앞머리를 결에 맞춰 쓸어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꾹꾹. 어머니가 아들 매무새 만져주는 듯한. 나카자와가 실눈 뜨니 그녀, 평소처럼 웃는다. 상냥하게 웃는다.

  나카자와가 놀라 뒤로 물러서다, 문턱에 걸려 우당탕 넘어진다. 이크, 하며 우스꽝스럽게 자빠진 그를 지나쳐, 그녀는 말한다. 문단속 잘 하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냉한 그녀의 태도. 나카자와는 꿈결같아 멍하니 머리 푼 그녀 뒷모습만 본다. 저벅, 저벅. 단화가 복도에 내딛힐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머리. 

  나카자와는 거칠게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따뜻한 온기가 있어, 꾹꾹 눌러 올려준 온기가 있어. 도통 모를 지경이다. 제 아무리 꼬집어도 깨지 않는 묘한 꿈.

  "나답지 않네……."

  호무라가 중얼거린다. 교내 밖은 벌써 어둑어둑하다. 넓게 이어진 하늘. 하지만 이 하늘이 미타키하라 다음도 있을 지는 모를 일. 호무라는 하아,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그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 아마 그를 불러낸건 그녀 자신일 것이라며, 호무라는 마냥 세상 끝까지 이어져 있을 것 같은 넓은 하늘 아래서 엷게 태연한 미소 짓는다. 평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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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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