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하나 풍(비주얼노벨)으로 써본 창작.

오리지널캐, 드림캐가 나옵니다. 그리고 치아키쨩이 나쁜 애 됐음.







이제 잘 모르는 아이가 나를 "나다"라고 부르는 것에는 익숙해졌다.

초등학생 이후로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던가?

한동안 잊고 있던 그 울림을 다시금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 "나다, 맞지?"


그때는 몸을 떨 정도로 놀랐다.

혹여나 나를 아는 사람인줄만 알고.


??? "난 아이하라 링고야!"

나다 "그래…… 아이하라 씨라고?"


그러나 처음 보는 얼굴. 이런 해맑은 아이가 내 주변에 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왜 이 아이가 갑자기 나를 불렀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링고 "우리 이번에 짝이야. 알고 있어?"

나다 "아……."


아이하라 씨는 내게 벽보를 확인해보았냐는 듯이 잠깐 그쪽으로 뒤돌아보았다.

난 아직 게시판을 보지 않아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링고 "한 해 동안 잘 부탁해! 나다쨩!"


아이하라 씨는 내 손을 꼬옥 쥐며 말했다.

그때 묘한 충족감이 손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



나다 "아이하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니까."

나루미 "그래, 링고. 좀 더 힘을 바짝 줘서 당겨야지."


아이하라는 낑낑거리며 시트를 씌웠지만 결국 주름이 남고 말았다.

나와 히카와가 동시에 달려들자, 아이하라가 울상으로 옆 침대로 몸을 돌렸다.


링고 "으앙! 두 사람 다 나만 괴롭히고! 유우노쨩 살려줘~"

사츠키 "안 되지, 링고쨩. 유우노는 내가 지도 중이니까 빼앗지 말아줘."

사츠키 "유우노는 힘을 너무 줬어. 조금 더 느슨하게."

유우노 "사, 사츠키 씨?!"


이시가미가 한 손으로 가타쿠라의 허리를 휘감으며 밀착했다.

가타쿠라는 당황한듯 얼굴이 새빨개져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시트를 정돈했다.

무슨 조화인지 가타쿠라의 손을 거친 시트가 이번에는 완벽하게 교환되었다.


사츠키 "역시 마음 먹으면 잘하는 아이구나. 나의 유우노는."

나루미 "아, 또 저 둘 자신들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히카와의 말이 맞는 게 저렇게 되면 저 둘은 뭔 짓을 해도 보질 못한다.


아키라 "바보 커플 놈들."


여태껏 말 없이 가만 서 있던 이나토리가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히카와는 그걸 보곤 비죽 웃었다. 아주 장난스럽게.


나루미 "흐응~? 우리 아키라쨩 외롭구나?"

아키라 "아니거든. ……꺅!"


히카와는 빠른 스탭으로 이나토리 뒤로 가서 한 팔로 허리를, 나머지 팔로는 가슴께를 감싸안았다.


아키라 "뭐하는 짓이야!"

나루미 "아하하, 좋으면서."


이나토리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져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무심결에 아이하라의 허리를 보았다.

이나토리만큼 얇진 않지만, 가타쿠라보단 조금 작은 느낌이 드는 어린애 같은 허리였다.

각자 자신의 연인에게 안기거나, 연인의 허리를 휘감고 있어서일까.

나는 순간 아이하라를 끌어안을 뻔한 왼팔을 오른손으로 지긋이 눌렀다.


링고 "아, 정말! 다들 그만 놀구!"


아이하라는 빨개진 얼굴로 자꾸만 성을 냈다.

먹을 즈음의 사과처럼 물들어 부푼 볼에 자꾸만 눈이 갔다.



>



아이하라가 우울하디는 얘기는 들었다.

……얘기를 들었달까. 사실 옆에 있으면 다 알 수 있는 거지만.

아무래도 문제는 동거하는 사촌과의 관계인 듯했다.

요컨대, 아이하라는 좋아하는 것이다. 그 사촌을.

우연히 이나토리가 아이하라한테 조언하는 걸 들었다.


아키라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얼른 관계 회복해. 관계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낫기 힘드니까."

링고 "으응…… 고마워."


커다란 식당 문 뒤에 숨어, 한참을 서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일단 아이하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치아키쨩, 이라고 아이하라는 늘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사촌이지만 성은 다르다. 외가쪽 친척이니까.

타카오 치아키 씨. 미카간을 졸업한 간호사로서, 나의 선배인 사람.

그리고 아이하라의 사촌인 사람.


나다 "……"

링고 "나 꼭 가서 사과할게!"


아이하라가 내가 숨어있는 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뒤도 안 돌아보고 쭉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꼭 무슨 그림 같았다.


아키라 "어라, 너……."


아이하라에 이어 천천히 걸어나온 이나토리는 날 알아챘다.


아키라 "설마…… 엿듣고 있었어?"

나다 "고의는 아니었어."

아키라 "흐음."


'과연 그럴까.'라고 이나토리가 작게 말했다.

그 말에 한소리할까 하다가, 그럴 맘이 들지 않아 말았다.


아키라 "아이하라 씨가 잘 될 거라 생각해?"

나다 "아이하라라면 잘 되겠지."

아키라 "……왜?"


이나토리는 의문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나다 "쟨 밝고 올곧잖아. 저런 앨 누가 싫어하겠어."

아키라 "하지만……."


이나토리가 전에 없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키라 "사촌이면 근친에, 동성애잖아? 그리고……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타카오 씨는…… '제대로 된'…… 사람 같고."


이나토리의 눈을 쳐다보자, 그녀는 눈을 돌렸다.

'제대로 된'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다 "네가 그런 말할 깜냥이 된다고 생각해?"

아키라 "현실적으로 봤을 뿐이야."


이나토리는 계속 눈을 피한채 말했다.


아키라 "그리고…… 나 봤어."

아키라 "타카오 씨가 남자랑 있는 거."



>



아이하라가 이틀이나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열이 심하다고, 임시 교사로 왔던 타카오 씨가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모두들 걱정했다. 특히 미카녀 시절부터 트리오였던 가타쿠라와 히카와가.

당장이라도 병문안 가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타카오 씨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치아키 "열이 심하지만 괜찮아, 단순한 감기니까. 병원에서 약도 타왔고. 그리고……"

치아키 "열이 심할 땐 혼자 쉬는 게 제일이니까."


타카오 씨는 웃었지만, 눈은 무언가 슬퍼보였다.

다들 그녀의 말에 이해한다는 듯이 수긍하고는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링고가 나으면 뭘 해줄까, 이런 말을 하면서.

수업 끝난 강의실엔 우리만 남아있었으므로 링고 얘기만 들렸다.

나는 강의실을 나서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아주 슬프기만 한 얼굴의 타카오 씨가 있었다.



>



영 타카오 씨의 태도가 신경쓰여서 가타쿠라한테 물어 아이하라네 주소를 알았다.

히카와가 알게 되면 같이 가자고 할 것 같아, 일부러 가타쿠라에게만 물었다.

가타쿠라도 분명 함께하고픈 눈치였지만 나는 적당히 애둘러 말했다.


나다 "히카와랑 네가 가면 아이하라가 괜히 무리할지도 몰라. 덜 친한 내가 후딱 프린트만 주고 올게."


가타쿠라는 이 말에 수긍한 듯 했다.

그래, 아이하라는 그런 아이니까.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유우노 "……나다 양은 똑부러지시니까요."

유우노 "꼭 나중에 링고쨩의 상태 알려주시기예요."


유우노가 단단히 일렀다.

내가 똑부러진다니, 무슨 뜻일까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빌라촌의 어느 빌라.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빌라.

하지만 알고 있다. 여기에 아이하라가 있다는 것을.

그것만으로 빌라가 굉장히 큰 성처럼 보였다.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성역처럼 느껴졌다.


나다 "바보 같긴."


작게 중얼거리고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가서, 뚜벅뚜벅 복도를 걸었다.


나다 "응?"


아이하라와 타카오 씨의 집이 있을 쪽으로 코너를 꺾어 들어가자, 복도 중앙에 누군가가 웅크려 앉아있었다.

설마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사실 설마가 아니었다.

이미 입은 소리치고 있었다.


나다 "아이하라!"


아이하라는 고개를 들었다.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어 손을 잡았다. 손이 꽤 찼다.

봄이라곤 해도 복도에 계속 나와있으면 추울 날씨였다.

봄점퍼 사이로 얇은 파자마와 살짝 드러난 가슴이 보였다.


나다 "……!"


나도 모르게 얼굴에 피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이하라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나를 보곤 눈물을 글썽였다.


링고 "나다쨩……"

나다 "어떻게 된 거야?"


아이하라는 갑자기 나를 확 껴안았다.


링고 "치아키쨩의 향기가……"

링고 "너무 강해서…… 못 있겠어."


아이하라는 열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근데 나도 막 열이 오르는 모양이다.


나다 "그럼 우리집에 와."



>



좁고 어두운 집이 부끄럽다.

짐 챙기려 슬적 들어간 아이하라네와는 차마 비교할 수도 없는 곳이다.

간호사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꽤 돈이 되는 건가.

……아님 내가 그냥 고학생인 건가.


링고 "실례하겠습니다……"


이젠 조금 진정 되어서 말가진 눈으로 아이하라가 우리집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얘 미카녀 출신이랬지. 사촌인 타카오 씨 쪽도 부자인 걸지도.

아이하라와 얘기할 때 미카녀생인 걸 의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신경쓰인다.

귀한집 아가씨가 이런 데서 지낼 수 있을까?


나다 "대충 짐 놓고 있어."


침대는 아이하라에게 내주고, 나는 여름용 이불을 꺼내 바닥에서 자자.

그런 생각을 하며 장롱을 열었는데.


나다 "으악!"


문이 열리자마자 쌓인 이불이 와르륵 쓰러졌다.

이사 때 대충 처박은 게 이런 업보가 될 줄은.

어차피 꺼내려던 이불들이 바닥에 깔렸으니, 좋은 게 좋은 건가.

대충 이불을 펴 깔고 있으니, 아이하라가 쭈뼛쭈뼛 침실을 들여다보았다.


링고 "저기…… 나 와인 가져왔는데."

나다 "와인?"


링고가 가방속에서 수건으로 돌돌 만 와인병을 꺼냈다.

와인을 즐겨마시진 않지만, 묘하게 마트에서 팔 만한 보급품처럼 보이는 와인이었다.


나다 "웬?"

링고 "그…… 마실까 싶어서."


링고가 묘하게 슬픈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타카오 씨의 것과 겹쳐보였다.

나는 와인병을 빼앗았다.


링고 "아……"


좋아하는 인형을 뺏긴 아이 같았다.

나는 식탁에 있는 자질구레한 식기를 죄다 싱크대에 몰아넣고, 언젠가 샀던 와인잔 세트 중에 두 개를 꺼냈다.


나다 "여기 코르크 마개 따는 게 있었는데……"

링고 "어…… 나다쨩? 마실 거야?"

나다 "네가 마시자며."

링고 "……으응."


아이하라는 석연찮은듯 가만 앉아있었다.

나는 어떻게 병따개를 찾아 와인병을 열었다.

뽕하고 명쾌한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아이하라 앞으로 잔을 끌어다가 가득 따라줬다.


링고 "음……"


아이하라는 불안한 듯 내 눈치를 봤다.


나다 "안 마셔?"

링고 "어, 아니. 그게."

나다 "너 술 마셔본 적 없구나."


적중인 듯 했다.

아이하라는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더니,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링고 "요리에만 써봤지 마셔본 적은 없어……"

나다 "그럼 이거 요리용 와인이야?"

링고 "아니, 치아키쨩이 마시는 거."


거기까지 말하고 아이하라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링고 "한심하다. 나 대학생인데 술도 마셔본 적 없고."


나는 아이하라 앞에 있는 술잔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애가 보는 앞에서 한잔 가득 와인을 원샷해버렸다.


링고 "……! 나다쨩?"

나다 "하으으으……."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났다.

사실 난 술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근데 왤까. 딱 봐도 장난 아닌 양을 원샷해버리다니.

내가 좋아하는 주량을 단번에 마셔버려, 머리까지 쭉 따스한 기운이 돌았다.


나다 "지금부터 마셔보면 되지."


아이하라는 그제서야 히히하고 웃었다.


링고 "응! 그러게!"


그리고 내가 싹 비운 잔을 들어 내밀었다.


링고 "한 잔 부탁드립니다!"

나다 "다른 잔도 있는데 왜 굳이 그걸로……"

링고 "그치만 나다쨩이 날 위해 꺼내준 잔이잖아? 이걸로 마시고 싶어."


뭔가 낯부끄러워져서 더 말하지 않고 두모금 정도 되는 와인을 따라주었다.


나다 "한 잔 하시지요."

링고 "그, 그럼 잘 받겠습니다."


아이하라는 바짝 간장해서 두 손으로 잔을 받아들고 쭉 들이켰다.

꼴깍하고 맑은 와인이 눈앞에 목덜미를 따라 내려가는 게 보였다.

누군가의 첫 술자리를 보는 건 처음이 아닌데.

친구들이 처음으로 술잔 부딪히는 걸 꽤 많이도 봤는데.

아이하라의 첫 술은 어찌도 이렇게 맑아보일까.


링고 "……맛있어."

링고 "신기하다! 맛있어!"


링고는 웃으면서 남은 한 모금도 마셔버렸다.


나다 "맛있어?"

링고 "응!"

나다 "다행이네."


와인 자국만 남은 잔을 내미는 아이하라.

잔이 계속 늘어가자 첫 잔의 신비함도 없어졌다.

내 눈앞에는 처음을 맛보는 아이가 아니라, 알콜에 취해 헬렐레거리는 사람만 있었다.

그래, 너무나 매력적으로 취한 사람이.


링고 "에헤헤. 좋아."


나는 탁자 위로 엎드리고 아이하라의 한 손을 깍지꼈다.

그 상태로 한동안을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이하라는 몽롱하게 취한 눈길로 날 내려다 보며 말했다.


링고 "뭐야아?"


히죽히죽 웃는 그 얼굴이 날 유혹하는 것 같아서.

나는 상체를 들어, 깍지낀 손을 잡아당겼다.


링고 "앗!"


가까워진 아이하라의 얼굴. 그리고 입술.

나는 가볍게 그 입술에, 나의 입술을 맞췄다.

나는 인정해야했다. 이 바보 같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단 사실을.


나다 "한동안 여기서 지내도 돼."


두근두근한 가슴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



아이하라는 도망가지 않고 우리집에서 지냈다.

술 취해 잠들어, 아이하라가 약간의 숙취로 하루종일 고생하고.

그 사건을 더 말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는 무언의 선을 그었다.

아이하라가 먼저 들어간 목욕물이 기분좋을 정도로 식어있는 나날.

내가 생각보다 익힌 채소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 나날.

아이들의 아이하라와 내 도시락이 같은 걸 보고 묘한 의심을 했을 때, 아이하라는.


링고 "놀리지 마! 정말!"


나는 벌개진 얼굴을 숨기기 바빴는데, 그 앤 꼭 신발끈 못 묶는 걸 놀림 받는 아이 정도로 행동했다.

그쯤 되면 마음을 놔야하는데. 이 두근거림이 느슨해져야하는데.

반대로 고동이 뜀박질해갔다.



>



말도 안 될 정도로 시간 감각 없는 나날이 지나고.

긴팔을 옷장에 넣을 심정으로 개고 있을 때, 아이하라가 말했다.


링고 "너무 오래 신세졌으니까. 나도 이제 가봐야지."

나다 "……"


맞는 말인데. 보내줘야하는데.

나는 어느샌가 일어서 아이하라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나다 "아이하라……"

나다 "아직도 타카오 씨가 좋아?"


내 목소리에 물기가 있었다.


링고 "……"


아이하라는 내 눈을 피했다.


나다 "아이하라."


나는 아이하라가 고개를 돌린 쪽으로 몸을 옮겼다. 어떡해서든 시선을 맞추려고.

아이하라의 눈에는 내 목소리 만큼이나 물방울이 그득했다.


나다 "왜 울어?"

링고 "안 울었어."


고개를 붕붕 흔들며,


링고 "안 울었다구. 울지 않았어."


그러나 그 말을 뱉고 아이하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링고 "이제 몰라.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는 우는 아이하라를 쓰다듬었다.

아이하라는 쭉 몸을 뒤로 내뺐다.


링고 "하지 마."


아이하라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링고 "치아키 쨩 같잖아."


그 날카로움은 금세 무너져서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링고 "나다 쨩, 내 얘기 좀 들어볼래?"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아이하라의 손을 더욱 꼬옥 쥐었다.

아이하라는 고개를 들었다.


링고 "나 치아키 쨩 좋아해."

나다 "알아."

링고 "가족으로서 말고, 정말…… 연인이 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

링고 "그렇지만 치아키 쨩, 남자친구 있었어."


남자친구라는 단어는 또 얼마나 오랜만인지.


링고 "몰랐어. 한번도 그런 얘기 안 했거든."

링고 "남자친구는 의사래. 사내 연애고, 집안에도 아직 알리고 싶지 않았다고 하더라. 알리면…… 바로 결혼이니까."

링고 "결혼하면 치아키 쨩, 일 관둘 거래."


링고 "난 치아키 쨩을 보고, ……치아키쨩에게 간호를 받고 나도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이 학교에 오고 싶다고 생각했어."

링고 "치아키 쨩이 졸업한 이 학교에서 공부해서, 옆에 나란이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링고 "그렇지만……"

링고 "치아키 쨩이 더 이상 '타카오 치아키'가 아니게 되면 어떡해? 

링고 "치아키 쨩이 간호사가 아니면 난 어떡해?"

나다 "……"


나야 모를 일이다.

타카오 씨가 간호사를 관둬도, 아이하라는 학교를 관둘 수 없다. 아이하라는 어린애도 아닐 뿐더러, 그럴 입장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하라는 학교를 졸업하고, 아마 간호사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올라타버린 레일. 아이하라는 여기서 뛰어내릴 정도로 용감한 사람일까?

내가 아는 아이하라는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하지만.


나다 "아이하라, 나는."


이 아이가 지금 당장 비눗방울처럼 터져 사라질 것 같아서.


나다 "난, 아이하라 네가 이 학교를 졸업했으면 좋겠어."

나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


붙잡아두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만 한다.


나다 "아이하라가 간호사가 되었으면 좋겠어."

링고 "어째서? 겨우 이런 마음으로 간호사가 되려는 건데."

나다 "그게 뭐가 나빠. 나도……."


아이하라가 나를 빤히 보았다.

그 눈에 홀린 듯 진심을 천천히 말했다.


나다 "……나도 너 때문에 학교 계속 다니는데."

링고 "에."


내가 말한 말에 내가 놀라버려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려버렸다.


링고 "나다쨩?"

나다 "……미안. 나 잠깐만 더 이러고 있을게."

링고 "저, 저기……."

링고 "나 조금 더 여기 있어도…… 될까?"


내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인 것만으로, 그녀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링고 "한동안 더 잘 부탁해. 나다쨩!"


그 웃음소리가 참 좋아서.

새삼 왜 내가 이 아일 좋아하는지 깨달을 것 같아서.

나는 또 붉은 얼굴만 마구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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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

B.

발렌타인 전날.

나는 초콜릿을 준비했다. 클라라 님과 반 아이들에게 나눠줄 것. 그리고 그녀에게 줄 것을.

이상한 일이다. 그녀와 주고받은 초콜릿만 해도 열 개가 넘을 것이다. '잘 먹을게요'를 반복하던 날들. 그게 다음날부터는 바뀔 것이다. 그저 '잘 먹을게요'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불안하다. 무섭다.

나는 정성스레 포장한 박스를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까끌한 촉감이 뭉친 숨결을 고르게 퍼트려주는 것 같다. 크게 한숨을 쉬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직접 만든 초콜릿과 세 번이나 다시 써버려린 편지.

"우도우 에이코 양에게……."

괜히 편지봉투 겉면에 쓴 이름이 이상하진 않은지 읽어본다. 우도우 에이코. 뛰어난 아이, 라고 써서 에이코(英子). 그 이름을 쓰는 게 이리 어려울 일이었을까. 이름을 겉면에 써버렸을 때, 꼭 무언가 큰일을 저지르고야 만 것 같은 느낌.

당신은 알까.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걸.

유우나 님과 했던 상담을 생각했다. 유우나 님은 응원해주셨다. 그건 사랑이고, 나는 할 수 있다고. 무엇을? 이 사랑을 쟁취하기를?

이제 내일인데도 현실감 없이 두리뭉실하다.

그 순간이 얼마나 떨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자꾸만 읊조리는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좋아"의 미묘한 차이 중 뭘 택하면 좋을지 모른다.

나는 잠에 들 때까지 그 세 문장을 자꾸만 되풀이하였다.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좋아.




"! 이쿠에 양."


에이코 양이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왠지 도망칠 것 같은 발을 바닥에 꼭 붙이고,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평안하세요오~ 에이코 양."

"평안하세요. 해피 발렌타인이에요."


해피 발렌타인이라는 말에 크게 몸이 떨렸다. 막 부뚜막에 올라서려다가 들킨 고양이처럼. 너무 부끄럽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수상한 거동을 눈치챈 에이코 양이 물었다.


괜찮아요? , 혹시 제 감기가 옮은 거 아니에요?”


가까이 다가와 나와 눈을 마주치는데, 나는 정말 도망가고 싶어져서. 가지런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에 주는 힘만큼, 다리가 땅에 꼭 붙어있기를 바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술에서 비릿한 고통이 퍼지고 있었다. 그 고통을 상기하며 용기를 냈다.


"에이코 양, 괜찮으시다면 오늘 방과 후에 뒤뜰에 와주실 수 있나요?"

제발을 덧붙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에이코 양은 의문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 같이 가는 게 아니라 제가 먼저 가 있는 건가요?"

", ……. 제가 잠깐 뭐 할 게 있어서어……."


의외의 질문에 당혹스러울 때,


평안하세요. 두 분 모두.”


낯익고, 여느 때보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 평안하세요오. 클라라 니임.”

평안하세요. 클라라 님!”


클라라 님의 등장으로 질문이 어물쩍 넘어갔다.

……는 듯싶었으나.


클라라 님, 방과 후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에이코 양이 클라라 님과 함께 오려는 것을.


저기, 클라라 님…….”


클라라 님이 오시면 곤란한데.

스스럼없이 곧장 클라라 님께 말씀드리는 에이코 양이 조금 밉다. ...아니, 그런 면을 좋아하는 거지만.

가슴 속이 오후 광장의 비둘기가 일제히 날아오른 것처럼 소란스럽다. 어떻게 말하면 단둘만 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클라라 님을 먼저 보낼 수 있을까. 고민은 끝내 해답까지 덩어리지지 못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클라라 님을 바라보았다.


, 저는…….”


클라라 님이 잠깐 텀을 두더니,


루시아 언니와 선약이 있어서 일찍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시며, 묘하게 나를 보고 웃으셨다.

클라라 님……! 감사합니다! 클라라 님이 이렇게까지 구원자로 보인 적이 있던가. 마주친 눈빛으로 최선을 다해 감사를 전했다.

클라라 님도 협력해주신 자리를 망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마음을 굳혔다. 그래, 나는 오늘 에이코 양에게 큰일을 저지르고 말 것이다.





클라라 님은 먼저 돌아가시고, 에이코 양도 뒤뜰로 가서 나밖에 없는 교실. 복도에는 아직 반 아이들이 몇 남아있었다.


그때 파티에 그 기업 후계자분이…….”

어머, 그분이라면 벌써 약혼자가 계신 게 아닌지?”

아이참, 아직 저희가 몇 살인데. 약혼이란 건 바뀌기 마련이랍니다.”

 

확연히 들릴 정도로 큰 소리는 아니지만, 내가 집중해서일까. ‘약혼이라는 말이 팍 박혀 들어왔다. 그들의 대화가 먼 세계 일처럼 느껴진다.

아직, 부모님은 약혼에 대한 말씀은 없으시다. 아직, 우리가 몇 살인데. 약혼이니, 장래니 결정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 그렇지만 그 아직이 얼마나 갈까. 에이코 양도, 나도 아직일 때가.

나는 책상에서 초콜릿 상자를 꺼냈다. 정말 직전. 아직 처음으로 물릴 수 있는 기회.

어젯밤 수십 번을 들여다보았던 상자 속이, 오늘도 그대로다. 그대로인 마음을 다시 덮어, 하얀 비닐백 속에 넣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마지막으로 한 발자국만 더.





뒤뜰에 들어서면 살짝 선선했다. 햇볕이 강하게 쏟아지는 운동장과 다르게, 교사 건물에 가려지고 나뭇잎을 지난 부드러운 빛만 드나드는 곳. 한 번 체에 걸러진 것 같은 고운 세계에 에이코 양만이 혼자 서 있었다.

나무 위에 무언가에 시선이 꽂힌 표정.

 

? 이쿠에 양.”


에이코 양이 나무에서 시선을 떼고 내게 다가왔다.


저 위에 누가 지어둔 새집이 있나 봐요. 짹짹이는 소리가 들려요.”

정말요?”


자세히 보니 목재로 지은 새집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아마 학교에서 관리하는 것이겠지. 안에 새가 있는지 정말 새소리가 들렸다. 에이코 양은 다시 새집을 빤히 지켜보았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무언가를 보면 끝없이 집중하는 것. 그 집중력은 짧지만, 정말 긴 것에 꽂힌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게 늘 궁금했다.

새는 에이코 양의 시선이 따가웠는지 고개를 빠곰 내밀었다. 갈색 머리가 꽤 귀여웠다. 새는 주위를 살피더니, 그 작은 구멍에서 쏙 빠져나와 날아갔다.

 

"……."

 

에이코 양은 안타까움을 입에서 터트리고, 날아가는 새가 멀리멀리 날아갈 때까지 보았다.

시선이 영원히 발 붙어있는 것에 머물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당장 날아가 버리는 새가 아니라…….


그러고 보니 오늘 초콜릿은 안 드렸네요.”


그러면서 에이코 양이 준 초콜릿은 클라라 님에게 드린 것보다 조금 작고, 반 아이들에게 나눠준 것보다는 조금 더 정성 들인 포장이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뒤로 숨긴 초콜릿이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 우세요?"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나만의 감정. 내게만 있는 감정 당신의 것은 아닌 감정. 나 혼자라는, 치명적인 겁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이쿠에 양……?"


이쿠에 양이 다급히 내 고개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엉망일 얼굴이 곧게 펴지지 않았다.

보여주기 싫은데. 도망치고 싶은데. 나를 살펴보는 그녀의 눈빛이 좋다. 나를 위해 온전히 쓰는 이 시간이 좋다.

턱을 잡던 손은 어느새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너덜너덜한 숨결 탓에 깊이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장 걱정되는 일을, 나는 말했다.


"에이코 양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미움이라니……."

"에이코 양이 내 앞에서 사라질까 봐……."

 

에이코 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쿠에 양, 제가 왜 사라지겠어요."

 

에이코 양이 날 달래려는 듯 손을 잡아주었.

꼬옥 잡은 손에서 그녀의 다정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그 따스함이 도리어 무서웠다. 옅은 열기가 곧 지워질 것 같다울음 탓에 온몸이 맥박질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에이코 양은 절 좋아하시지 않잖아요!"

 

한껏 토해내고 나서야, 현실감이 어질어질 피어 올라왔다.

눈치챘을 때는 그렇게도 빌고 빌었던 다리가 달리고 있었다.




망했다.

난 내 방에 틀어박혀 침대 한가운데에 무릎을 안으며 앉았다.

정말 엉망이었다. 유우나 님과 클라라 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워졌다. 그 두 분을 떠올릴 면목도 없었다.

가슴에 감정의 자리가 있다면, 자신감이 닳아없어져있는 게 보일 것 같았다.


'내일 학교…….'


너무 울어서 팽팽해진 기분 속에 하나 이성적인 생각이 들어왔다. 수업은 내일도 있다. 학교에 가면 에이코 양을 만날 것이고, 어찌 됐든 반나절을 함께 있어야 한다. 에이코 양이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얼굴을 할지.

방안 가득 막연한 겁이 차올랐다. 나는 거기에 빠져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쩌면 좋지. 하루나 이틀 정도는 병결을 낼 수 있겠지만, 그 이후엔…….

똑똑. 외부의 소리에 방 안에 있던 겁이 쫙 빠졌다. 욕조의 마개를 연 듯.


"이쿠에 양, 괜찮아요?"

", , , 에이코 양?!"

"들어갈게요?"


내 방문으로 에이코 양이 들어왔다. 머릿속에 '?'라는 큰 글자 하나가 쾅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에이코 양은 곧장 내 침대 옆쪽에 앉았다. 나도 그쪽으로 몸을 옮겨 나란히 앉았다.


"편지 읽었어요."

"……?"


에이코 양은 가방에 손을 넣었다. 안에서 어젯밤 내가 그토록 만지던 초콜릿 박스가 나왔다.

생각해보니 들고 있던 초콜릿 박스가 어느샌가 없어졌었다. 무작정 뛰쳐나갔을 때 나도 모르게 손에서 놓아버린 걸까.

이런 식으로 진행될지 몰랐기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이쿠에 양, 저는."

 

운을 떼는 에이코 양의 다음 말에, 나는 다만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A.

저질러버렸다.

너무 놀랐다. 설마 이쿠에 양이.


"……."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말은 똑바로 하자. 설마 '이쿠에 양이' 아니라, 설마 '바로 오늘'.

이쿠에 양에 대해서는, 아마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확신은 아니었지만, 오늘 확신으로 변하였으므로. 그 애가 날 좋아하는 것. 그리고 오늘이 그것의 절정이었다는 것.

나는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잠깐 심호흡을 하곤, "죄송해요."라고 말해버렸다.

감히 내가 어찌 그녀와 사귈 수 있겠어.

저 멀리 하늘에서 새떼가 날아간다. 모두가 줄을 맞춘 가운데, 한 마리 새가 조금 늦어 대열이 흐트러졌다. 그게 보기가 싫어서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어떻게 클라라 님을 배반하면서, 그녀와 사귈 수 있겠느냐고.

나는 다시 걸어갔다. 얼른 침대에 가 눕고 싶다. 해 질 녘 귀갓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이러기 있기예요?"


지금처럼 기품있고 아름답지만, 조금 귀여운 어린 날의 클라라 님.

클라라 님이 전에 없이 화내셨을 때가 있었다.

공작시간이 있는 날이었는데 내가 깜빡하고 가위와 풀을 두고 온 날이었다. 당연히 가위와 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클라라 님은 싸늘한 눈길로 어린 나를 바라보셨다. 그것만큼 무서운 일이 있었을까. 나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 제가 다른 조 아이들에게 빌려올 테니까요. 클라라 님."

"다들 자기들 먼저 쓰고 줄 텐데, 그러면 너무 늦어요."


클라라 님은 고개 숙인 내 멱살을 잡으며, 크게 뺨을 때리셨다.

", 클라라 님! 에이코 양……."


이쿠에 양이 어쩔줄 몰라 울먹였다. 반 아이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당장 달려오셔 클라라 님을 내게서 떼놓고 설교하셨다. 클라라 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잘못을 선생님께 호소하셨다.

나는 아픔을 넘어선 막연함이 엄습했다. 혹여나 클라라 님이 나를 버린다면? 내가 못나 다시는 말도 걸지 않으신다면?

나는 크게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다시는 없었을 것이다. 클라라 님과 이쿠에 양이 나를 떠날까 봐 너무 무서웠다.

이쿠에 양이 내 등을 쓸어주었다. 울음 그치기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이쿠에 양이 사탕도 주고, 물도 가져다주었다. 내가 진정할 때까지 손을 잡아주었다. 흐릿한 시야로 이쿠에 양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았던 기억.


"그만 뚝 하세요. 같이 사과하면 클라라 님도 용서해주실 거예요."


이쿠에 양이 내 눈물을 닦아주며 해주었던 말.


"제가 늘 함께 있을 테니까요오."


그 나른한 말의 온기.

마음이 동하며 두근거렸다.


…….”


눈이 확 떠졌다. 침대 위, 기억에서 쫓겨나 버린 기분 나쁜 감각.

순간적으로 회상이 끊긴 이유. 어릴 적의 어렴풋한 감정선이 아니라 너무나 뚜렷한 두근거림.

어린 이쿠에 양이 떠올랐다. 다독여주던 이쿠에 양, 함께 숙제를 할 때 인상을 찌푸리던 이쿠에 양, 오늘 보았던…… 도망치기 직전의 울먹이던 이쿠에 양의 얼굴. 내가 거절했을 때의 다시 울 것 같던 이쿠에 양의 얼굴. 편지에 빼곡하던 그 아이의 감정선.


이거 어떡해.”


다시 한번 그 편지를 읽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귀까지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쿠에 양은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학교를 나왔다. 아침부터 나를 피하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낀 클라라 님은 의외로 태연하셨다. 우리 사이의 이상한 기류에 구태여 끼어들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 나는 이쿠에 양에게 인사만을 하고,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저기, 에이코 양.”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이쿠에 양은 포장도 채 뜯지 않은 내 초콜릿과, 그때 그 초콜릿 박스를 건넸


"……"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나는 말없이 이쿠에 양을 보았지만,

 

"……

 

이쿠에 양도 역시 말없이,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잠시 서 있던 그녀는 "갈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전에는 편지만 보고 다시 닫았기 때문에 상자 속 초콜릿은 그야말로 새것이었다. 하나 에 넣은 초콜릿은 어른스러운, 씁쓸한 맛이 났다.

 

'여태껏 밀크 초콜릿이었는…….'

 

여태껏 이쿠에 양이 주던 그런 초콜릿은 아니라는 실감이 들었다.

 




별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걸까.

점심시간, 이쿠에 양이 옆에 앉은 클라라 님을 피했다. 클라라 님은 웃었지만, 당혹스러워 보이셨다.


이쿠에 양, 왜 클라라 님을 피해요?”

, 에이코 양?!”


나는 울컥거려서 한마디 뱉어버렸다. 클라라 님이 일어나셔서 나를 제지하려 드셨지만, 나는 무시했다.


저희 같이, 클라라 님을 따르기로 했었잖아요.”


이쿠에 양은 잠자코 듣는가 싶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먼저 시비 건 내가 압도될 정도로 곧게. 그리고 그 시선은 그대로 클라라 님께 옮겨졌다.


더는 안 따라다닐 거예요. 클라라 양.”

이쿠에 양!”


이쿠에 양의 팔을 잡았다. "무슨 무례를"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의 눈이 보였다. 그 싸늘한 눈빛 속에는, 물기로 울망진 눈동자가 있었다.

 

절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내 손을 뿌리친 이쿠에 양은 빠른 걸음으로 반을 빠져나갔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아진 것을 알았다.


대체 왜 그랬어요, 에이코 양!”


클라라 님이 안절부절못하며 말씀하셨다. 그런 말투로 해서 해결될 줄 알았냐며 채근하시며. 모든 게 옛날과는 정반대가 된 상황이었다. 나는 괴리감에 헤매며, 내 마음에 있는 뚜렷한 공포를 말했다.

 

"저는, 이쿠에 양과 지내다가 클라라 님이랑 멀어질까 봐 무서워져서."


클라라 님은 잠깐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날 보더니,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고 얼른 쫓아가 보세요."

그렇지만, 클라라 님.”

왜 그런 일로 무서워하는 거예요.”

 

클라라 님이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다고 두 분이 제 친구가 아닌 건 아닌데."


클라라 님의 다정한 말. 이쿠에 양이 나간 길에서 그 아이의 흔적이 보이는 듯 했다. 상상으로 그 아이를 떠올리는 만으로도 간질간질한 기분. 나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금방 돌아올게요!”

 

터질 것 같은 무언가를 꼴깍 넘겨 삼키고, 나는 반을 뛰쳐나갔다. 반 아이들이 길을 터줘서 아주 쉽게 나갈 수 있었다.

복도 끝쪽 계단을 타려는 이쿠에 양이 보였다. 곧장 복도를 달렸다. 여태껏 살면서 교내를 이렇게 뛴 적이 있었을까? 올라가는 계단의 층계참에서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이 위층은 특별실만 모여있어 계단엔 아무도 없었다.

 

"이쿠에 양."

"그만 하세요."

 

이쿠에 양의 눈망울에서 결국 눈물이 조금 흘렀다. 이틀간 이쿠에 양의 우는 얼굴을 얼마나 본 건지.

나는 그 붉은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쿠에 양의 눈가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떼자, 깜짝 놀라 울지도 못하고 있는 이쿠에 양이 코앞에 있었다. 물기 져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놀라서 살짝 벌린 입이, 붉게 상기된 뺨이, 꼬옥 쥔 양손이 귀여워서. 그 모든 걸 꼬옥 안아주고 싶어졌다.

 

", 에이코 양?"

 

포옥 안은 이 몸이 나와 참 닮아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도 이쿠에 양을 좋아해요.”

?”

 

이쿠에 양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 이제 클라라 님이랑 같이 안 다닐 거예요.”

상관없어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이쿠에 양은 잠깐 몸을 떼고, 나를 보았다. 훌쩍이는 호흡으로 겨우겨우 잇는 말.


"진짜요?"

"사실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건 알고는 있었지마안~"


이쿠에 양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 우는 온기가 사랑스러워서 자꾸만 안을 수밖에 없었다.


 


B.

아직 2월이라 그럴까. 학교는 벌써 노을에 물들어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아, 나는 크게 심호흡을 놓았다. 풀린 감정들이 화단을, 운동장을, 벽돌길을 뛰쳐 다니다 부딪히더니 팡하고 터져 사라졌다. 남은 것은, 아주 가볍고 상쾌한 마음뿐.

 

클라라 님께…… 혼나버렸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이었다. 클라라 님과 함께 다니며, 그분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에이코 양이 조금 놀란 듯 나를 보았다. 그 의구심에 찬 푸른 눈과 마주치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바로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제가 말했지만, 정말 이게 혼난 걸까요?”

혼난 거지요.”


우리에게 이렇게 쓴소리하시는 클라라 님은 처음이었다. 화가 아니라, 충고하는 듯한, 걱정했다는 듯한 말투. 여러모로 혼내며,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이제 저랑 안 놀아주시면 안 돼요. 두 분."이라고 투정하시던 클라라 님. 정말 좋은 분. 따를 이유가 있는 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이코 양은 웃음이 멈추고도, 입가에 미소가 그대로였다. 안도감이 느껴지는 얼굴.

 

갈까요, 이쿠에 양.”

네에.”

 

왠지 손이 잡고 싶어.

조심스레 뻗은 내 손을, 에이코 양이 깍지 껴버렸다. 조금 놀랐지만, 그 꽉 채워진 기분이 나쁘지만 않아서. 딱딱하고 충만한 존재감을 느끼며 우리는 걸어갔다.


"근데 제가 어릴 때부터 이쿠에 양 좋아하는 거 알고 계셨어요?"

"후후,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면 부끄러워하곤 하셨잖아요오."


나는 손을 잡은 채로, 상체를 조금 숙여 에이코 양을 올려다봤다. 행동이 조금 역동적이게 되어버렸지만, 이렇게 올려다볼 때면 눈에 띄게 당황하곤 했으니. 에이코 양은 이런 시선을 좋아하시는 걸까? 잠깐 아닌 듯 나를 바라보던 에이코 양은 얼마 못 가 예전처럼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뭔가 부끄러워졌다.


"이제 연인이니까."

"네에?"

"이, 이제 연인이니까 이런 일로 하나하나에 부끄러워하면 안 될 텐데 말이에요."

"아……."


에이코 양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더욱 꼬옥 쥐었다. 우리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걸었다. 서로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는 그냥 석양에 물든 탓이라고, 변명하면서.

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

믿는 마음이 너의 마법.’

 

샤리오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못 믿는 건 아냐.

 

 

, 다이애나!”

 

다이애나가 뒤를 돌아본다. 희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살짝 주위를 맴돌고, 그 푸른 눈이 나를 응시한다. 몇 번이고 마주한 적이 있는 그 눈이. 아주 반가운 사람 보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음보는 사람 보는 것 같지도 않다. 싫어하는 사람을 보는 눈은, 더 아니다.

 

나는 아주 잠시 머릿꽁지가 쭈볏 설 정도의 냉기를 느낀다.

 

무슨 일이죠?”

 

되묻는 그 낯익은 목소리에 바로 등뒤로 쫙 정렬하고 있던 냉기의 정령들이 내 몸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얼굴이, 그리고 온몸이 화악 달아오른다.

 

, , 그게. , 뭐였더라…….”

 

별일이 아니라면 그만 가보겠어요. 다음 수업 준비를 해야하니까. 앗코도 놀지만 말고 미리 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 다이애나는 역시 부지런하구나~”

 

다이애나는 살짝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당연하죠. 누구누구 씨랑 다르게.”

 

다이애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원래 가던 쪽으로 걸어나갔다. 내가 왔던 방향과 반대로.

 

다이애나는 늘 그렇다. 내가 다이애나를 쫓아가는 방향에서 반대로 걸어간다. 내게로는 걸어오지 않아. 그녀의 빛나는 머리카락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가만 서서 바라본다.

 

믿는 마음이 나의 마법…….”

 

그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야. 그냥…….

 

나는 뭘 어쩌면 좋지?”

 

 

 

수시, 요즘 앗코 이상하지 않아?”

 

롯테가 몸을 낮추며 소근거린다. 아니 소리만 낮추면 되는데 왜 몸까지 낮추는 거야? 덩달아 나도 몸을 낮출 수 밖에 없잖아. 이게 더 수상해보일텐데.

 

앗코라면 뭐, 샤리오의 카드라도 잃어버린 거 아니겠어?”

 

정말~ 왜 맨날 수시는 그렇게 진지하지 못하게…….”

 

롯테가 투덜투덜 보기좋게 실례되는 말만 콕콕 집어 말한다. 롯테는 평소엔 조용한데 가끔 이상한 바람이 들면 엄마처럼 조잘대는 나쁜 버릇이 있다. 이런 롯테는 말리기 귀찮은데. 묘하게 말도 평소보다 잘하게 되고.

 

……그러니까 수시가 맨날 다른 사람한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오래된 문이 끼익거리고 앗코가 들어온다. 문이 걸칠 정도로의 힘으로만 밀고, 앗코는 아무런 말 없이 자기 침대에 눕는다. 평소의 앗코는 옆방에서 찾아와 한 소리 할 정도로 쾅 소리나게 문을 닫는데 말야. 롯테가 신경써서 불 꺼줄까? 물어도 대답이 없다. 베개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고 일어나지 않는다.

 

저거…… 죽은 건 아니겠지?’

 

숨 막힐텐데 잘도 저러고 누워있는다. 미동도 없음.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좀 이르지만 잘 시간처럼 되어버린다. 롯테도 자려는 듯 부산스럽게 책상 위를 정리한다싶더니 침대에 앉아있는 내 눈을 빤히 본다. 눈으론 날 보며 고개짓으로는 문을 홱홱 가리킨다.

 

그 정돈 말로 해도 되지 않냐고…….‘

 

먼저 문 밖으로 나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조금 뒤에 롯테가 따라나온다.

 

역시 이상해.”

 

그러니까 뭐가.”

 

뭐긴 뭐야, 당연히 앗코지. 방금 봤잖아. 그 모습. 분명 무슨 일이 있던 걸 거야.”

 

? 롯테는 정말 모르는 건가?

 

하긴 이 순진한 북유럽 아가씨는 은근히 그런 쪽으론 잼병이니까.

 

귀찮으니 그냥 말해줄지, 조금 더 골려볼지 고민하던 사이 롯테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앗코도 역시 들은 걸까. 그 소문.”

 

지금 뭐 소문 도는 게 있었어?”

 

수시 정말 몰라? 하며 롯테가 한층 더 목소리를 죽여 말한다.

 

다이애나가 학교 관둔다는 소문이 돌고 있잖아.”

 

…….”

 

그것 때문에 풀 죽은 거면 정말 도와줄 수도 없고…….”

 

우리방 틈에서 새어나온 빛이 길게 복도를 가로지르지만 저 끝의 달빛까지는 닿지 못한다. 중간에 끊긴 빛은 한없이 미약해보인다. 그 빛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고 있었다.

 

역시 남의 연애사는 관련되는 게 아니네.’

 

 

 

듣기 싫은 이야기는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기 마련이다.

 

캐번디쉬가가 어떻게 됐길래 그래?”

 

영국 정세 자체가 불안하잖아.”

 

아무리 뿌리 박고 있다고 해도 요즘 시대에 순혈 마녀집안이 있을만한 곳이 어딨겠어.”

 

걔 아니더라도 영국 애들 많이 본가로 돌아가던데.”

 

근데 지금 상황에 돌아가봤자…….”

 

눈을 콱 감고 발을 쿵쿵 굴리며 걷는다. 그 소리로 조금이라도 안 들을 수 있게끔.

 

그렇게 걸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잖아요.”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다이애나. 주위의 수근거림이 거짓말처럼 멎고 조용하다. 롯테가 근처에 있다면 냉기의 정령들이 내 몸으로 달려드는 걸 볼 수 있을 거다. 평소와 다름없는, 파랗게 착 가라앉은 눈동자가 내 질척한 속내를 꿰뚫어볼 것 같다.

 

더 서있다간 얼어붙을 거야.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다이애나의 팔을 뿌리친다. 다이애나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고만 있다. 나는 한 걸음 뒷걸음질 치다가 곧바로 몸을 돌려 뛰쳐나간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정말 나는 뭘 어떻게 해야.

 

 

 

그 이후로 일부러 다이애나를 피해다니고 있다. 다이애나 본인만이 아니다. 다이애나와 관련된 화제나 이야깃거리는 전부 피하고 있다.

 

그래설까. 롯테가 이상하게 신경써주는 게 눈에 보인다. 수시는 그대로지만. 그 관심이 되려 불편해서 기숙사 소등시간 전까지의 저녁과 밤 사이, 요즘은 빗자루 주행로에 올라와있곤 한다. 밤이 되어 바람이 쌀쌀해 후드를 뒤집어쓰면, 마치 별이 흐르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 천천히 어둠을 더해가는 저녁과 밤을 지나는 시간. 그 사이로 아주 선명한, 빗자루 끄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이끌며 다가온 인영이 말을 건다.

 

여기서 보는 것도 두번째네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후드를 걷고 그 모습을 확인한다.

 

다이애나?”

 

정해진 시간 외에 이곳은 출입금지라고 말하는 것도 두번째예요.”

 

2주만에 얼굴을 맞대다곤 믿기지 않을정도로 평소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한다.

 

그러는 다이애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다이애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높은 곳은 역시 바람이 많이 분다. 나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쓴다. 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밝게 마도석이 빛나고. 바람이 귀 쪽의 천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단지 불어가는 시간이 나와 다이애나 사이를 지나간다.

 

높은 데를 정말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높은 곳은 좋아해.”

 

비꼬는 투에 나는 꾸밈없이 답한다.

 

샤리오는 늘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나도

 

오늘까지도 샤리오, 샤리오.”

 

다이애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떨리는 목소리. 다이애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일어서 다이애나 곁으로 다가간다. “저어, 다이, 애나?” 나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단 세 발자국이, 아직 남은 그 세 발자국이 다이애나와 나의 간격을 채운다.

 

다이애나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나처럼, 주행로를 부술 듯 발을 굴리며, , , . 코앞까지 다가온 다이애나가 내 어깨를 콱 잡고 고개를 든다. 희번득 뜬 눈이 분노에 일그러져 탁하다. 다이애나답지 않아.

 

만일 떨어지면 빗자루도 못 타면서.”

 

?”

 

이대로 여기서 떨어지면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다이애나는 곧 쓰러질 사람처럼 다시 고개를 떨구고 내 두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달달 떨리는 손에서 전해지는 악력이 아프다.

 

당신은 왜 늘 그런 근거없는 자신감만 있죠?”

 

다이애나, 말이 심하…….”

 

"내가 가는 거 뻔히 알면서도 도망만 치고 있고! 그 잘난 자신감은 어디갔죠?"

 

몸 전체가 일제히 굳는다. ", 도망이라니 그런" 변명을 해보지만 혀도, 생각도 딱딱하다. 결국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몇 초간의 정적. 아주 작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난 것 같다. 그리고나서 바로 다이애나가 나를 가볍게 밀친다.

 

"이제 됐어요.“

 

티아 플뢰레, 깔린 목소리에 반응하여 다이애나의 빗자루가 그대로 부유한다. 다이애나의 손아귀까지 날아오른 빗자루는 가만히 주인의 명을 기다린다.

 

앗코 같은 거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다이애나는 그대로 빗자루에 탄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유려한 솜씨로 주행로를 타고 날아오르는 빗자루가, 어린시절 읽은 동화책 마녀의 모습처럼 달을 가로지른다.

 

…….”

 

방금까진 내게 걸어와주던 다이애나가, 저 앞도 아니고, 아득히 위로, 달로 사라져간다.

 

믿는 마음이, 나의 마법.”

 

샤리오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이제라고 그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내 마법은……?"

 

 

 

그 뒤로 다이애나를 보는 일은 없었다. 확정된 사실은 더이상 소문으로도 돌지 않는다. 수업에서 선생님들의 질문에 답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손으로 꼽을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깨달았다. 정말 다이애나가 사라지는구나.

 

다이애나가 언제 갈까. 분명 무의식중에, 언뜻은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른다. 억지로라도 기억하지 않았으니까.

 

샤이니 로드……. 뭔가 최근엔 안 들여봤네.’

 

침대 매트리스 사이에 쑤셔넣어뒀던 샤이니 로드를 꺼내본다. 7개의 보석에 음울한 7명의 내가 비친다. 보석들은 투명하지만 스스로 빛나지는 않는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봤을 땐 조금 더 빛났던 것 같은데 말야.“

 

샤이니 로드를 창문가 쪽으로 들어올려 태양빛에 비춰본다. 그러자 보석에 비친 것은…….

 

아슬라 선생님?”

 

나는 고개를 돌려 아슬라 선생님을 본다. 언제 문이 열렸는지, 선생님은 언제부터 거기 서 계셨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캐번디쉬 양이 가는 거, 알고 있니?“

 

햇볕 사이로 반짝이는 먼지들이 춤추듯 올라가고 내려가길 반복한다. 흰 빛 사이를 맴도는 반짝이는 것들. 눈앞을 맴도는 흰 머리카락. 아찔해진다. 방금 볼 수 없어질 것을 보고야 말았다.

 

카가리 양, 정말 안 갈 거야?”

 

"선생님, 제발 그만 좀.“

 

아슬라 선생님의 붉은 눈이 반짝인다. 아주 잠깐 왠지 모르게도 그 모습이,

 

아슬라 선생님 분명 저번에.”

 

샤리오와 닮아서.

 

샤리오에 대해 안다고 하셨죠?”

 

, 으응? 그건…….”

 

선생님은 당혹스러워하시다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곤 있지.”

 

“‘믿는 마음이 나의 마법’.”

 

……샤리오가 했던 말이지?”

 

선생님은 이 말 싫어하세요?”

 

아니 싫어하진 않아. 오히려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 마법은 믿음을 전제로 이뤄지는 거니까.”

 

아슬라 선생님은 내 눈을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쉰다.

 

라는 건 너무 좋은 말만 하는 티가 나니?”

 

저는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샤리오를 동경해서, ‘믿는 마음이 나의 마법이라는 말에 동경해서.”

 

그래, 맞아. 그 말을 좇아서.

 

어째서인지 넘치는 감정을 주워담을 수가 없다. 감정은 물처럼 녹아내려 얼굴에서, 눈에서, 코에서 흘러난다. 감정을 다시 찾으려고 끌어들여보지만 훌쩍임에 목소리만 뭉개진다.

 

그런데 저, 이제는, , 믿으면 좋을, , 모르, 겠어요.”

 

선생님은 내 두 손을 잡아준다.

 

카가리 양, 들어줄래?”

 

손끝으로 훨씬 뜨거운 체온이 맞닿는다.

 

나는 사실 이제 아무것도 믿지 못한단다.”

 

왜요?”

 

믿는 데엔 이유가 있지만, 믿지 못하는 데엔 이유가 없는 법이지.”

 

…….”

 

난 운명과 마법에 순응하고 있지만.”

 

선생님이 오른손을 들어 내 얼굴을 쓸어내린다. 뜨거운 기운이 지나가고 기분 좋은 시원함이 눈가를 맴돈다.

 

하지만 카가리 양은.”

 

선생님이 탁 튕겨낸 눈물방울들이 나와 선생님 주위로 모이더니,

 

믿음만으로 여기까지 온 카가리 양은."

 

형태보다도 반짝임을 갖고 제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튀어오른다. 돌고래, 가오리, , 조랑말,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믿고 있던.

 

나와는 다를 거라고 생각한단다.”

 

사람의 모습에 팔 대신 날개를 가진 하피. 하피 하나가 내 앞까지 날아와 콧잔등을 건들이고 다른 동물들과 함께 창문가로 날아올라 빛처럼 사라진다.

 

선생님! 그 마법은!”

 

선생님은 미소지으며 말한다.

 

샤이니 로드를 보렴.”

 

샤이니 로드의 일곱 보석이 빛나고 있다. 선생님은 내 손을 놓는다. 어느샌가 선생님의 손이 뜨겁게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온몸이 화악 달아올라, 마치 몸에 달라붙고 있던 냉기의 정령들이 전부 점프해서 내려간 것 같은 느낌.

 

후회하기 전에 쫓아가렴.”

 

녹트 오페 오든 플레토르, 그 용기에 힘입어 나는.

 

 

샤이니 아르크!”

 

 

그래, 내가 믿는 것은.

 

 

다이애나!”

 

! , 앗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다이애나의 위에 올라타있었다. 옆으로 여행용 가방이 구르고 있고, 다이애나는 막 채비를 서두르는 사람처럼 바깥 외출우의를 입었다.

 

나 이제 알게 됐어!”

 

"?"

 

너를 믿는, 이 두근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이, 바로 나의 마법이라는걸!”

 

?”

 

"그러니까 네가 가더라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꼭! 다이애나가 있는 곳까지 쫓아갈테니까!"

 

다이애나가 어이없다는 듯 가만 있더니,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

 

갑자기 와선 무슨 소릴 하나 싶더니! 왜 하필 가는 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




((죄송합니다 원고 쓰다 말았습니다 ^_ㅠ 과거의 절 원망하십시오)

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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