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





  마미에게 그건 트라우마 같은 것이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어, 죽어'라고 속삭일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릴적 그녀는 울음이 많았다. 그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한없이 손이 가는 아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마냥 무서워 하고, 자신을 숨길 줄 모르는. 요령이 없는.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 빤히 눈만 보아도 놀라 울음부터 터트리렸다. 마미는 엄마 없이는 아무 곳도 못가는 아이였다. 먼 친척이던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그녀가 '혼자 살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무슨 의민지 알 길 없던 것이었다. 

  마미네는 혼자 살기에는 넓었다. 그녀 부모가 남긴 재산이 꽤 되었던 덕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쓸 것을 생각하면 빠듯했겠지만. 이 큰 사치는 마미의 최초 결심이었다. 이따금 나는 그녀의 집 구석, 창가에 엎드려 있곤 했는데, 그녀는 마치 엉겨붙은 듯한 나를 떼어내 침대나 쇼파 위에 앉혀주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면, 그녀는 빙긋 웃으며 먹을거리를 내왔다. 그것이 거의 년단위로 반복되었던 것 같다.

  자립심이란 대단한 것이라, 타인을 두려워하던 마미에게 요령을 익히게 했다. 사람에게 말을 거는 법을, 호감을 갖게하는 표정을 짓는 법을, 부탁하는 법을, 거절하는 법을, 아주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모든 것을 혼자해내야 했던 그녀. 그녀는 고슴도치 같은 사람이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감의 인간관계. 

  번듯하게 어른스레 잘 자란 그녀였으나 울음이 많은 것은 변함 없었다. 어둔 밤, 햇님이 사라지고 손끝이 묘하게 차가워지면 그녀는 안을 상대가 없어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나는 멀찍이서, 언제나 엉겨붙어있던 창가에서 그 과정을 전부 보았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자가치유 과정. 꼭꼭 숨어들어간 그녀는 소울 젬만 내놓고 숨을 내뱉기만 했다.

  그 어린 마미에게 혼자 살아남은 것은 트라우마 같은 것이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스스로에게 '죽어, 죽어'라고 속삭일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너는 우수한 마법소녀였어. 마미. 네 덕분에 또한 우주의 수명이 늘어났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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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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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노조] 지구멸망

소설 2015. 2. 24. 01:17


커플_왼쪽에게_총이_있고_5분_내로_오른쪽을_죽여야_지구의_멸망을_막을_수_있다면_왼쪽은



  "5분인기라."

  노조미가 손대자, 빨간 탁상 시계의 불이 탁 켜진다. 5:00에 점멸했던 불은 4:59, 4:58을 지난다. 노조미는 여느 때와 같다. 노조미니까. 뮤즈의 정신적 지주인 노조미니까. 그녀가 이성을 잃고 운다거나, 화를 낸다는 것은 붕괴다.

  그런 노조미가 총을 쥐고 있다. 그것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쿡 들이박는다.

  에리는 멍하다. 노조미, 그녀, 무얼 하는가. 푸석 주저 앉은 에리, 의연하게 서 있는 노조미. 안돼. 에리의 바람소리. 안돼. 에리의 바람. 죽으면 안돼. 순간 노조미, 방아쇠를 쥐어짠다. 철컥.

  에리의 동공이 더할 수 없게 커진다. 푸르던 눈알 속, 어둠을 그득 담고서야 그것은 잠긴다. 철컥, 철컥. 몇 번의 차가운 쇳소리.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니. 이 무신 차별이가. 그체?"

  평생 신을 믿어본 노조미. 오늘만은 그 존재를 원망해본다. 노조미는 총을 내린다. 

  "벌써 1분이나 지난기라."

  빨간 불이 3:47을 막 지났다. 에리는 시계를 본다. 시계가 갉아먹는 시간. 이미 다 포기해 힘이 없다. 땅을 두드리며 발광할 힘조차 남지 않다. 

  "에리치."

  "에?"

  말라비틀어진 에리의 목소리. 여느 때와 같은 노조미와 대조되어 더욱 비통하다. 에리는 이 일의 종막을 어찌 끝내야할지 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땅을 두드리며, 두드린 땅을 뛰어다니며, 악악 소리쳐가며 저항한 것.

  에리는 여전히 주저 앉았고, 노조미는 서있다. 우위에 선 노조미, 그녀 에리에게 총을 겨냥한다. 에리와 노조미의 거리는 세엇걸음. 평범한 고등학생인 노조미란들 못 맞출 거리가 아니다. 에리의 동공은 커지지 않는다. 다만 동공같은 총구의 구멍을, 깊디 깊은 어둠을 본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철컥. 또 불발.

  시계는 2:26. 헛된 시간이다. 노조미는 쇳덩이를, 주저앉은 에리에게 바닥으로 쓱 쓸려보내준다. 그 차가운 물체가 에리의 다리에 닿는다. 에리, 그녀 순간 소름 돋는다. 난생처음 만지는 살인 도구에. 

  에리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쥔다. 입 속으로 총구를 쑤셔넣는다. 어둠 속에, 어둠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철컥. 또한 불발. 에리는 웁웁 거리며 방아쇠를 마구잡이로 당겨댄다. 고장이나 나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시계는 어느덧 1:04.

  에리는 입에서 총을 뺀다. 침으로 살짝 젖는다. 에리는 고개를 떨구고 운다. 총구도 떨궈져 지면에 숨을 죽인다. 노조미는 다만 무표정으로 본다. 시계는 어느덧 0:40을 지난다.

  "에리치."

  에리는 그 예쁜 호칭에 고개를 든다.

  느릿느릿하던 시계의 점멸이 빨라지는 듯 하다. 0:37.

  노조미는 웃고 있다. 교복 입은 그녀, 정말 소녀인가. 이런 상황에서 미소 짓는 그녀, 소녀인가. 형편없이 망가져 교복 니트 조끼 끝자락을 주먹쥐고 울먹이는 에리가 더 소녀 아닌가. 어째서 소녀가 소녀 아닌 사람을 죽여야하는가. 잔인치 않은가. 소녀가 살인 도구를 손에 쥘 필요 있는가.

  예외없이 시계는 0:26

  "노조미."

  에리와 노조미의 거리는 세엇걸음. 평범한 고등학생인 에리란들 못 맞출 거리가 아니다. 에리는 고개를 처들고.

  "노조미, 노조미, 노조미, 노조미."

  형편없이 망가진, 말라비틀어진 에리의 목소리. 나직하다.

  "에리치, 살아."  

  여느 때와 같고, 간결.

  철컥, 하는 소리도 묻는 총성과 동시에 시계는 0:13에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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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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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무라 짱은 장미 받아본 적 있어?"

  카나메 씨는 나는 없어, 라고 덧붙였다. 에히히하고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게 섭섭한 투는 아니었다. 장미는 좋아하지만 한번도 받아본 적은 없어, 라고 말하는 투가.

  장미는 향이 짙다. 굳이 장미가 아니더라도 향이 있는 것들은 안 되었다. 꽃의 향이란 벌레를 꼬기 위한 것이다. 그 유혹의 자극이 환자한테 좋을 리 만무했다. 나를 포함한 주위의 사람들은 미약한 자극에도 마녀에게 넘어가 잡혀먹힐 약한 이들이었다. 이따끔 문병자가 꽃바구니라도 사온들, 창밖에서 바라보기만 한 게 몇 번이던가. 스산한 병원 복도에서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는 꽃을 그저 바라만 보았던 걸 받아봤다고 말해도 되는건가. 짧은 고민 끝에 말한다. 저도 없었어요. 카나메 씨가 의외라는 듯 헤에, 대화 앞머리에 바람을 넣는다. 꽃은 병문안 선물로 잘 해가니까. 괜히 찔려서 흠칫거린다.

  갑자기 웬 장미 얘기? 편의점 앞에는 붉은 장미들이 예쁘장하게 포장 돼 진열되어있다. 꽃보다도 화려한 포장지에 눈이 휘황찬란하다.'당신의 사랑을 전하세요♥' 광고문구가 퍽 직설적인만큼 크고 화려하다. 사랑과 하트는 새빨갛게 물들여서 강조해놨다. 누가봐도 세상 모르는 젊은 애들을 노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가격이 꽤 높다. 꽃바구니에 붉은 장미 대여섯개 푹푹 박아넣기만 했는데 8천원이라니. 심지어 나름 안개꽃이라고 풍성하게 보이려 대충 뿌려둔 덩쿨은 조화다. 저런 걸 팔다니, 양심이 있는 건지 어쩐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비싸다는 감만큼은 느껴졌다. 멍하니 광고문구에 시선을 좇아가니 Rose day라는 문구에 도달한다. 아, 내일이로즈 데이였다. 장미꽃을 선물하는 날. 그래서 장미 얘기가 나온 거였구나.

  아무리 봐도 붉은 장미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편의점 주위를 총총 둘러보았다. 온통 붉은 장미뿐이다. 카나메 씨와 붉은 장미를 번갈아 쳐다본다. 잎이 어긋나서 중심점을 겹겹이 감싸돌고 있는 붉은 장미. 귀부인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정열적인 여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고풍스럽지만 저 소용돌이 속에 격렬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느낌이다. 둥글둥글한 눈매와 턱선, 빛이 모여있는 분홍빛 눈, 자그마한 동물같은 카나메 씨.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장미꽃의 느낌상의 이질감도 있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호무라 짱? 카나메 씨의 호명에 놀라 정신을 차린다. 나도 모르게 카나메 씨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워서 홱 고개를 돌린다. 이제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볼지.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며 걸었다.

  "내일 보자."

  "아. 아, 네! 내일 봬요." 

  땅만 보고 걸었더니 벌써 헤어질 때였다. 부끄러운 마음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다. 카나메 씨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울적해져 혼자 가는 길이 유난히 멀다. 터덜터덜 상가건물이 늘어선 길을 걷는 도중,

  "이런 데에 꽃집이 있었나?"

  반 호기심으로 문을 드밀고 들어서자 딸랑, 하는 맑은 종소리가 점내를 울린다. 어서오세요. 젊은 남자가 꽃 사이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다. 왠지 카나메 씨의 아버님이 떠오르는 청년이었다. 내일이 로즈데이여서인가, 보기 좋은 곳에 장미꽃이 색색별로 진열되어 있다. 내가 장미에 눈길을 주자, 눈치 빠른 그가 말을 건다.

  "장미 찾으세요? 로즈데이라 괜찮은 게 많이 들어왔답니다."

  한 장미, 한 장미. 찬찬히 보여주며 설명한다. 내가 소녀아이인걸 의식했는지 재배방법이나 값에 대한 얘기는 일절 없고, 로맨틱한 이야기만. 그러다 문득 분홍 장미에 눈이 꽂힌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 같은 색. 단순, 맹세…….

  "분홍 장미는 꽃말이 많지만, 일흔두송이는 행복한 사랑이라는 꽃말이 있답니다."

  로맨틱한 그의 설명에 부끄러워졌다. 나는 카나메 씨한테 그런 의미로 드리는 게 아닌데. 그냥, 로즈데이니까.

  "여섯 송이 주시겠어요?"

  그는 싱긋 웃으며, 기술 좋게 빽빽이 꽂힌 장미 속에서 여섯송이만 쏙쏙 골라 빼낸다. 그리고 곧바로 꽃을 싸준다. 투명한 비닐에 분홍 장미가 잘 보이게끔, 그러나 상하지 않게끔 소중히 포장해준다. 그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꽃을 다루는 손에 사랑이 그득했다. 이 집은 쿠폰제라며, 열번 이용하면 꽃 다섯송이를 서비스한다며 그는 꽃다발과 같이 넉살좋게 쿠폰도 하나 건내준다. 꽃집을 열번이나 이용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련지? 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었다.





  "분홍?"

  "카나메 씨한테는 분홍 장미가 어울리니까……."

  일부러 샀어요, 라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단순히 편의점에서 파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미친 모양이다. 어디서 샀어? 비싸지 않았어?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질문을 퍼붓던 카나메 씨는 눈이 도는 내 모습에 그냥 싱긋 웃곤, 고마워 했다. 확하고 얼굴에 뜨건 김을 퍼붓는 듯 했다.

  "다, 단순히 친애로 드리는 거예요. 로즈데이니까요."

  "응. 그렇구나. 고마워."

  나는 거짓말을 할 때면 말이 길어졌다. 그녀는 다 안다는 듯 씨익 웃었다. 뭔가 지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자꾸만 말이 길어졌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정말 카나메 씨 혼자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리 무모한 거예요?"

  "단순해. 나는 엄마, 아빠, 타츠야, 사야카 짱이랑 히토미 짱, 마미 선배, 쿄코 짱, 그리고 호무라 짱, 너를 지키고 싶으니까."

  "가면 죽을거야. 자살이라구!"

  울며불며 막는 나를, 너는 가벼이 안아준다. 기쁜데,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하는 것 같아서. 네 옷을 꽉 쥔다. 내 등을 토닥여주는 느낌이 좋다.

  

  "이 장미 '단순'이 꽃말이지? 단순하게, 잡념을 비우니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알았어. 꽃 선물 고마워."

  고개를 들어 너를 본다. 너는 웃고 있었다.

  "정말 기뻐. 호무라 짱을 지킬 수 있어서."

  "가지마."

  "그럼 이별이네. 건강히 지내."

  "가지마!"

  왜 '또 보자'가 아닌거야? 왜, 이별이라고 하는거야? 처음 듣는 네 작별 인사에 정신이 어떻게 될 것만 같다.

  버클러의 모래시계가 찰칵하고 뒤집어진다. 나의 의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더이상 '이 세계의 카나메 씨'를 구할 수 없다며 단념할 때, 그 무의식이 이 시간을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뿌예지는 발푸르기스의 밤을 향해 뛰어날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하얀 빛에 먹혀간다.

  하얀 빛이 강해져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쯔음, 나는 하얀 천장 아래, 하얀 침대 시트 속, 하얀 병동에서 하얗게 질린 채 일어난다. 오른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오전 10시 쯤. 그대로 시선이 내려와 옆 테이블의 탁상달력을 본다. 퇴원날이라고 꽃무늬 쳐둔 날의 전전날까지 가위표가 쳐있다. 오른손을 들어올린다. 깔끔한 실버링, 약지 손톱의 보랏빛 다이아몬드 표식. 시계와 달력을 보고 현실을 깨닫고, 소울 젬을 보고 소원을 깨운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여기서 마법소녀인 아케미 호무라가 될 수 있다. 나의 한심함에, 또 그녀를 희생했다는 한심함에 만사 제쳐놓고 울음부터 터트린다. 꿈이 아니다. 꿈이라면 좋을련만……. 아니 이미 꿈이긴 하다. 그건 이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다음엔 반드시 카나메 씨. 아니, 마도카 널……."


=


  "마법소녀는 마녀가 되는거야?"

  

  네가 진실을 알아차리는 때가 있다. 나는 조심히 너를 어른다. 맞아, 마법소녀는 마녀가 돼. 뭐가 널 그리도 괴롭게 하는 걸까. 역시 마법소녀라는 굴레에서 너를 빼낼 수 없는 걸까.

  마음이 약해질 때, 나는 어김없이 꽃집을 들른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한결같은 그 가게. 내 돈으로 살 수 있는 최대한의 장미, 여섯송이. 내가 매번 꽃을 사면 그 꽃들은 100% 똑같은 꽃일까. 겉보기엔 똑같지만 나로서는 알 길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그게 전과 똑같은 장미라고. 변하지 않았다고.

  "저기, 손님. 혹시 뵌 적 있나요?"

  오늘 주인의 대사가 다르다. 질문에 놀라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어설픈 기억에 퍽 혼란스러워하는 태다. 나는 퍼득 정신을 차리곤 없다고, 처음 본다고 답한다.  오랫동안 병원에 있어서 꽃냄새 맡을 새도 없었다고 덧붙인다.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 왔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데 말이 길어진다.

  그는 갸웃하면서도 말없이 꽃을 싸준다. 투명한 비닐에 분홍 장미가 잘 보이게끔, 그러나 상하지 않게끔 소중히 포장해준다. 역시 그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받아든 장미다발은 여섯송이가 아니었다. 다섯송이 많은 열한송이. 내가 묻기도 전에 그가 말한다. 덤으로 다섯송이 넣었어요. 이 집은 쿠폰제라서, 열 번을 이용해야 꽃 다섯송이를 받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쳐다보니 그, 변명하듯 손님 낯이 익다고. 인연인 것 같다고. 수줍게 웃는다. 그 비싼 값을 그저 낯이 익다며 그냥 주다니?  작업멘트였으면 멋없어도 정말 없는 거였다. 그는 또 오라며 도장 하나 찍힌 쿠폰을 건내준다. 지갑 속을 보니, 도장 하나 찍힌 쿠폰이 아홉장 들어 있어, 이번이 열장째였다. 그러니, 거짓이 아니었으니 풍성하기까지 한 그 열한송이 장미다발을 군말없이 받아들었다.

  "분홍 장미는 꽃말이 많지만, 일흔두송이는 행복한 사랑이라는 꽃말이 있답니다."

  로맨틱한 그의 설명.



  "마도카. 이 도시에 곧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무서운 마녀가 올거야."

  네가 알기 쉽도록 차근차근 말해준다. 몇번째 설명인지 넌 모를테다. 얼추 설명을 다 들은 너는 힘없이 빙글 웃었다.

  "그런 엄청난 마녀면 호무라 짱 혼자서는 힘들겠네."

  "아니, 나 혼자 충분해."

  쿄코한테 도움을 요청했던 것도 그녀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서였다며, 거짓을 고한다. 마미나 사야카 따위보다 내가 훨씬 강하다며, 거짓을 고한다. 말이 길어진다. 초조해진다. 아아, 나는 정말 거짓말을 못한다. 너에게 들킬까 무서워서 벌벌떨며 고한다. 너, 눈에서 몽글몽글 눈물방울을 터트린다. 울고싶은 건 나건만.

  "어째설까. 호무라 짱을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어."

  네 그런 상냥함이 나를 얼마나 나태하게 만들었는지, 오해시켰는지. 나는 맹세를 굳히고자, 너에게 그 열한송이의 장미를 바친다.

  "제발 내가 너를 지킬 수 있게 해줘. 이 맹세를 받아줘."

  너는 눈을 둥글게 뜨면서도, 그 맹세를 받아든다. 내가 이 꽃을 지키면 너는 살아남을 것이다. 여기까진 언제나와 같지만, 이 앞에서부터는 큰 기적이 필요했다. 그런데 기적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호무라 짱. 일흔한송이 째야."

  "일흔한송이?"

  "이제 장미 한송이면 단순한 친애도, 맹세도 아니게 돼."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걸까. 깜짝 놀라서, 뭔가 물을 생각도 못하고 가만 서있었다.

  "꽃 선물 고마워."

  너는 장미 다발을 들고 떠났다. 나는 그 감사를 언젠가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결국 발푸르기스의 밤을 뛰어넘지 못하고 너를 끌여들였다. 안된다고, 여기 네가 있어선 안된다고 그렇게 외치는데 너는 무시한다.

  너는 의연했다. 멋지기까지 한 네 뒷모습. 너의 눈동자가, 살짝 등돌려 슬쩍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본다. 제발 내게서 눈을 떼지 말아줘.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다른 것을 채우지 말아. 나의 간절한 소원은 소리 없이 무너지고, 너는 인큐베이터와 마주선다. 너의 입술이 움직여 말을, 소원을 만든다. 막고 싶다. 그 입을 틀어막고 싶다. 나는 이 광경을 언젠가 또 봤었다. 헌데 인큐베이터의 반응이 다르다. 표정이 있을 리 없는 그의 동공이 커진 것 같다.

  그렇게 너는 신이 되었다.





  마도카……. 멍하게 네 이름을 발음해본다. 카나메 마도카. 마도카. 손에 남은 리본이, 아스라이한 몸의 부유감이 현실감 없다.

  며칠을 그렇게 현실감 없이 보냈다. 모든 게 둥실둥실했다. 수업 내용은 값어치 없는 쪽잠 같았고 모든 인간관계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학생이 넘치는 학교, 카나메라는 성씨를 가진 3명. 왜 어디에도 마도카가 없는 걸까. 용기를 내어 너의 집에 갔다. 거리에서도, 학교에서도 너의 존재를 찾을 수 없어, 너의 근원을 찾아서. 이끌리듯 도착한 네 집 문패에서 볼 수 없는, 흔적도 없이 지워진 네 이름. 카나메 준코와 카나메 타츠야 사이의 공백을, 원래는 있어선 안되는 그 짧은 공백의 틈을 몇 번이나 매만지고서야 나는 네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카나메 마도카라는 사람은 이 집에 없었다, 이 거리에, 이 학교에 없었다.

  그날 늦게 집에 들어온 나는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잠들었다. 오랫동안 쐰 찬 밤바람에 열병을 앓았다. 위아래가 분간 안되는 몽롱함이었다. 멍하니 서있으니 발목이 서늘했다. 나는 발목까지 찰랑찰랑 넘치는 맑은 강을 건넜다. 구두랑 스타킹이 젖었지만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강가에는 언뜻 낯익은 꽃도, 이름 모를 들꽃도, 계절감 모르고 웬갖 꽃이 피어 있었는데 장미만은 없었다. 내 키에 두배가 넘는 커다란 해바라기가 나를 내려다보고, 내 엄지발톱만한 민들레가 인사하는 이곳인데 장미가 없다. 괜히 가슴이 미워져서 울먹이며 걷는데, 거짓말처럼 장미 화원이 나타났다. 조금 높은 강가 둔덕을 기어 올라와 그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엉겅퀴에 스타킹이 찢기고, 다리가 따끔거렸지만 상관 없었다. 

  붉은 장미, 노란 장미, 하얀 장미, 까만 장미. 장미향이 훅 끼쳐와 정신이 아득해졌다. 향은 유혹의 자극. 분홍 장미만 없었다. 색색의 장미가 나를 꺾으라며 손직했다. 손이 갔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 이건 안돼. 저 멀리서 마치 빛을 머금은 듯한 장미가 제 몸을 뽐내고 있었다. 마지막 송이. 일흔두번째 분홍장미. 단지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져서 다리 힘이 풀렸다. 너는 어딨을까. 

  딸랑, 맑은 종소리가 들렸다. 딸랑, 강 쪽이었다. 딸랑, 나를 부르고 있었다. 힘겹게 일어서 강으로 걸어간다. 점점 상류로 올라설수록 강의 깊이와 물살이 가파라졌다. 그 깊고 빠른 강 넘어에 뒤돈 네가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네가 있었다. 뒤통수라 하나, 어찌 네 모습을 잊겠는가. 반가움에 앞뒤 안 가리고 강을 건너려 한 쪽 발을 드민 순간, 몸이 확 쏠렸다. 이대로 들어갔다간 저세상 행을 면치 못하리라고 경고하는 듯 했다. 다리도, 건너갈만한 구조물도 없었다. 네가 있건만, 바로 눈앞에 네가 있건만. 발만 동동 구를 수 밖에 없는건가. 마도카, 소리를 내도 물소리에 묻혀 닿지 못했다. 마도카, 아무리 소리쳐도 너에게 닿지 않았다.

  "호무라 짱. 오랜만이야."

  너의 조그마한 목소리는 물소리에 묻히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이 닿은걸까. 네가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보았다. 너의 눈을, 그 깨끗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내가 무너졌다. 너는 이윽고 완전히 몸을 돌렸다. 네 품속에는 일흔한송이의 장미가 한가득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무른 것도 있고, 피로 새빨갛게 물든 것도 있다. 분홍색 장미 모양 온전히 유지하는 게 채 열송이가 안됐다. 그 수만큼, 그 이상으로 너는 죽었다. 나는 땅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너를 다시 봐서 안도한건지, 얼싸안을 수 없는 불완전한 만남에 절망한건지, 그 장미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인건지.

  네가 빙글 웃었다. 흐릿한 시야에 미친 듯이 눈물을 닦아내고 널 보려했는데 눈물이 멎지 않는다. 너의 모습이 흐릿하다.

  "마지막 장미지? 그거. 무슨 의미야?"

  나는 장미 가시에 찔리는 줄도 모르고 그 줄기를 꼭 쥐고 있었다. 상처를 보자 조금 따끔거렸다. 마도카가 허탈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치는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울고 있던 내가 어처구니가 없나보다.

  고개를 들고 다시 너를 본다. 여신상에 꽃을 바치는 소녀처럼, 나는 무릎을 꿇고 너에게 그 한송이 꽃을 정중히 내민다. 그리고 속에서 계속 꾹 억눌렀던 그 말을, 꽃말을 빌려 말한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너는 말없이 웃는다. 대답해줘. 대답해줘, 마도카. 점점 새하얀 빛이 너를 먹어간다.




  하얀 빛이 강해져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쯔음, 나는 비적비적 일어난다. 결국 너는 답해주지 않았다. 거짓말은 못한다는 거야?

  시계를 확인하려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일순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돼. 테이블 위에 있는 저건. 나는 천천히 테이블까지 걸어갔다. 마치 그것이 도망칠까, 조심하듯이. 스럭하고 비닐 움직이는 소리가 내 손을 타고서야 나는 그 실체를 믿을 수 있었다.

  "병문안 선물로 장미는 안되는데. 마도카도 참."

  손 안에 있는 건 세보지 않아도 틀림없이 일흔두송이일 분홍 장미다발이었다.

  네 답은 이거구나. 행복한 사랑이구나. 나 정말 행복해, 마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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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성하는 테사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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